아버지 편지
잘 지내다가
둘째
언니에게 필요한 돈을 먼저 주셨구나. 그래서 저렇게 농자금을 보내셨네. 나는 학교에 잘 다니고 있다고 안심하라, 하시다니. 속마음이 전해오네. 아버지 미워했던 마음 뽑혀지길 원합니다. 우리 걱정 아버지가 다 하셨네. 언니가 보관한 저 편지는 이제 가보家寶가 되었네. 저기 저 편지지 색깔 좀 봐. 누렇다 못해 삭아 버렸어. 저걸 버리지 않고 간직하고 있다니, 언니 고마워. 아버지 숨결이 퍼져 나오는 것 같아. 직접 읽는 소리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우리 아버지 마음 아는 사람, 당신 밖에 없었구나. 아버지에게도 지금 나처럼 갱년기가 있었겠지. 당신 인생에 대한 생각도 많으셨겠지. 왜 안 그렇겠어.
저 때,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어. 언니는 졸업하고 대학 가면서 말이지, 시골에서 도시로 진짜 독립을 했지. 아버지가 쓴 날짜 보니까 언니가 자취방으로 이사한 지 스무날 정도 지났을 때네. 나는 저 시절 생각하면 지금도 몹시 힘들어. 고등학교 2학년이면 애기야 애기. 요즘 어린이 기준이 고3까지인가 그럴걸?(웃음) 나는 애기였단 말이야. 그때 우리 아버지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지금은 아버지 마음도 조금은 알 것 같아. 우리는 각자 자기 문제 앞에서 그걸 뛰어넘느라 다들 고달팠어. 엄마도 그러셨겠지. 언니도 그랬고. 나도, 동생들도. 저 오래된 편지 속에 젊은 날 우리 식구들이 있네.
도순아 보아라
그간 몸 성히 학교에 진학하느냐
이곳 개목리 집에서는 고추 이식이 한참이구나
다름이 않이라 전번에 부탁한 돈이 미리 마련치 못하여 죄송하오나
금번 농사 자금을 다수 찾았기에 이제야 一金 貳萬원을 送金하오니
잘 받아주길 바란다
받는 즉시 회답 바라며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몸조심 하여라
그리고 미순이는 방도 옴기고 학교에 여전히 진학 정진하고 있으니
안심하여라
잘 지내다가 다음 상면시로 미루고 이만 주리겠다
1986年 3月 26日
아버지 書
셋째
하긴, 둘째 언니가 이사를 좀 자주 다니긴 했지. 아버지는 그것을 근심하셨던 것 같아. ……방도 옴기고……. 안 그러면 이 말을 적었을 리 없다고 봐. 편지에 아버지 염려가 고스란히 담겨있네. 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어. 가장 힘들었던 기억만 남아 있어. 빨리 무주를 떠나야지, 지긋지긋한 이놈의 시골 집구석을 떠나야지, 떠날 거야, 떠나고 말거야. 빨리, 빨리! 나는 이를 갈았어. 그래서 괴목중학교 졸업하자마자 마산으로 갔잖아. 내 인생에 가장 획기적인 터닝 포인트를 찍었지. 지금 우리 딸이 중학교 3년인데 비교해보니, 그 당시 산업체 고등학교로 간 내가, 내 친구들이 너무 대견스럽네. 집 떠나기 전에는 주말마다 인삼밭 철거, 고추 따기, 도라지 밭매기, 나무하러 가기, 지금으로 말하면 ‘알바 전성기’였어. 지나간 시간 속에서 우리 가족은 모두가 위대했구나. 정말 대단해.
글 고랑 사잇길을 해젓으며 한 남자가 걸어 나온다. 그의 얼굴은 불콰하다. 어디선가 아버지 냄새가 나는 것이다. 당신 손에는 볼펜이 들려 있다. 자취한다고 집 떠난 큰딸 생각이 나신 것일까. 아버지는 마루 끝머리 쯤 다리를 접고 앉으신다. 듣는 사람도 없다. 이 골짜기에서 지지바를 대학 갈키는 놈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라. 취하기만 하면 집안을 울리고, 담장을 넘던 아버지 고함소리. 나는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다. 지금 생각하니, 젊고 듬직한 마흔여섯 중년의 남자. 딸 다섯, 아들 하나. 책가방 둘러메고 손 벌려 줄서는 아침마다 그 남자 옆으로는 제법 친절하지 않은 한 여자도 서 있었지.
봄맞이 청소 중이었다. 책장을 옮기다가 발견한 편지 한통. 사진을 찍었다. 형제가 모인 단톡방으로 전송하였다. 허수룩한 상자 속에서 서른일곱 번이나 되는 봄여름이 지나간 것이다. 저 혼자 퇴색한 편지를 마주한 순간 아찔한 프루스트 현상을 일으켰다. 아련해지다가 점점 선명해지는 추억의 향기. 마루에 엎드려 어눌한 펜대를 굴리셨을 아버지가 페이드인으로 다가왔다. 자취집 대문 앞에서 성의 없이 봉투를 찢어버리는 스무 살의 내가 보인다. 가위로 곱게 잘랐을 리 없었을 것이다. 당신은 분노의 대상이었으니까. 찢어버리고 싶은 마음 이상의 불경함으로 아버지를 공격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쉰일곱이 되었다. 세월에도 색이 있다면 흰색일까, 회색일까, 흰색이었다가 회색일까.
편지 속에는 계시지 않은 아버지가 계셨다. 흩어진 동생들도 한자리에 있다. 꽃샘추위가 갑작스러운 그해 삼월도 있다. 세월의 무게는 코끝을 시큰하게 만들기도 하는구나. 내 나이 칠십이 되고, 아니 아버지가 하늘 길 돌아가신 예순 네 살이 될 때 다시 마주한다면 나는 어떤 마음으로 물큰해질까. 오래된 편지는 더 무겁구나. 삐뚤빼뚤 비틀거리는 아버지 육필은 왜 더욱 그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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