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일기
퍽이나, 잘 익은 피자두 하나. 흙바닥에 떨어지더니 으깨어져 멍든 모습이라고나 할까. 손가락으로 확대한 사진 속에는 헐렁하게 튿어진 살점도 보이고, 허옇게 식은 살도 보였다. 주변부로는 검 보랏빛 환대(環帶)가 상처 부위를 감싸고 있다. 이 정도면 뭐, 며칠간 소독하면 좋아지겠군, 보다는, 헐! 이 정도면 병원으로 가셔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휙 앞질러 갔다. 검지 손가락은 성형외과 진료실 전화번호를 누르고 있다. 어르신 욕창이 좀 깊어 보여서요, 여든다섯 여자 환자입니다. 의료원으로 가면 진료 가능할까요?
외과 선생님 두 분이 외부로 파견 나가셨어요, 어렵겠는데요. 개인 의원으로 보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굳이 보건의료원에서 치료 원하시면 6시 이후 응급실로 오셔야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야. 외과 선생님 두 분이 파견? 언제, 어디로, 왜? 전화기 너머 간호사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질문들이 솟쳐 나왔다. 의사 선생님은 기한을 정한 파견인지, 다시 보건의료원으로 돌아오시는지, 파견 지역에서 전역이신가, 돌아오기는 하는가. 의료 대란이라 그렇다 치자. 보건의료원에 의사가 한두 명이던가.
드레싱하기 어렵다고? 학부 과정에서 배우고 인턴, 레지던트 수련 과정에서도 배우는 건강 문제 아닌가요? 게다가 낮에는 어렵고, 오후 6시 넘어 응급실로 오면 가능하다는 이야기는 무슨 논리인가. 보건진료소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환자는 어디로 의뢰해야 하나. 실타래가 하얀 김을 뿜으며 마구 엉겨드니 갑갑한 느낌이다. 갑자기 갈 길 잃은 사람처럼 벙벙하다.
어르신이 오셨다. 은발(銀髮)이 단정하시다. 휠체어에 앉아 기다리는 모습이 여느 날보다 더 신경 쓰였다. 진료기록부를 열었다. 뇌졸중 후유증으로 프레탈정100mg(실로스타졸:폐색성 동맥경화증, 당뇨병성 말초혈관병증 궤양, 동통 및 냉감 등 허혈성 여러 증상 개선제) 복용, 아스피린 100mg, 항고혈압제, 치매 예방약 복용, 요실금약은 기저귀 차심으로 최근 홀딩. 현재 병력에 ‘욕창’을 추가한 후 관리 내용을 저장하였다. 환부를 열었다. 조심스럽게 거즈를 뗀다. 사진 속 피자두색 환부. 마르거나 젖은 과피 같은 모습이 오늘에 이른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엉덩뼈 장골능(iliac crest) 아래 깃든 꽃송이, 잠잠히 검붉다.
나는 지뢰밭으로 들어가는 어떤 병사 같은 외로움에 휩싸인다. 좋아질 것이라는 확신보다는 나빠지면 어쩌나 하는 염려가 크게 다가온다. 간호 현장에서 수없이 접해왔지만, 망설임이 더 큰 것은 궤양의 예후를 섣불리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르신, 여기 만지면 아프세요? 식사는 잘 하십니까, 상처를 씻어내겠습니다. 좀 차갑습니다. 기다려주십시오. 거즈 붙입니다. 다 됐습니다. 주사 놓겠습니다. 일어나십시오. 나는 어르신 귀에 바짝 다가가 처언천히 말씀드렸다. 약 잘 드시고요, 내일 꼭 오셔야 합니다. 아셨죠? 잘 나을 겁니다. 걱.정.하.지.마.세.요! 걱정하지 마시라는, 이는 무슨 근거로 이룩한 나님의 자신감인가.
장갑을 벗고 일어섰다. 덮여 있으면 모른다. 아프다는 소리 내지 않으면 알 수도 없다. 들춰 보면 냄새가 난다. 환부가 드러난다. 세상이 욕창이다. 성형외과 선생님을 다른 지자체로 불러간 이 소요(騷擾)가, 군정(郡政) 최선에도 열악한 의료기관 교통 접근성이, 도움받을 이웃의 부족이, 쇠락을 넘어 소멸을 지나 고사(枯死)에 이른 농촌의 의료 상태는 위중증이다. 외과적 중재와 단백질 분해효소 넉넉한 도시 피부를 농촌 피부에 이식하고, 뼈와 근육, 지지 조직을 접합해야 할 창상 4단계 쯤 아니려나.
어느 뼈는 돌출되고 어느 살은 눌린다. 압력과 마찰이 일어난다. 응전력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용기를 상실한 환자에게 홍반을 부르고, 급기야 궤양을 유발한다. 나는 구멍 난 돌봄이 일으키는 휑한 바람 앞에 서 있는 모습이다. 「상처 소독 & 드레싱 교환」이라는 한 줄 완성을 위한 최소한의 공공보건 지역의료 안심 시스템은 어쩌다 이리 엉망이 되었을까.
농촌 인구 고령화율 50% 넘은 지 오래라는 이야기는 이제 비루하다. 욕창 한 건에 투영된 의료 실태와 간호 지표들. 예방이 치료보다 경제적이라는 뻔한 사실은 두말할 필요 없지만, 예방이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거동 불편, 방치, 부주의, 불균형 식사 등 욕창을 부르는 요인은 셀 수 없을 정도이다. 욕창 환자는 2시간마다 체위 변경을 해야 한다. 국민 룰 같은 지침이다. 이를 위하여 환자 옆에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가족이든 간병인이든 돌봄 노동을 감당해야 한다. 욕창이 생겼다는 것은 돌볼 인력, 돌볼 능력 부족의 방증이다. 이곳이 나으면 저쪽에 생긴다. 새 살이 차올라 으깨진 곳을 채우기까지 많은 정성과 시간이 필요함은 두말하여 무엇하리.
의사가 돌아오고, 응급실뿐 아니라 외래진료실에서도 언제든 드레싱이 가능하고, 보건진료소에서는 환자를 의뢰하고, 주 1회 문을 여는 아주 기형적 보건지소 운영이 정상화하고, 그리하여 환자는 일상으로 돌아가는,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이 우리 마을에서도 거짓말처럼 이루어지기를, 간절, 간절히 기도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