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않는다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을 그대로 두는 연습

by 두썸띵



일기장에 이런저런 일들을 적다 보면, 내가 이렇게 많은 것을 머릿속에 담아두고 있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됩니다. 출근 시간, 사람들로 꽉 찬 지하철에 몸을 구겨 넣으며 느끼는 처량한 자기 연민부터, 나도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인데 회사 업무라는 이유로 여러 사람들과 감정 실랑이를 해야 하는 힘 빠지는 순간까지. 하루의 일기 주제는 차고 넘치지요.


구구절절 상황과 감정을 풀어내다 보면 어느새 일기장 두세 쪽이 금세 채워집니다. 꽤 최근까지 저는 이런 감정 쓰레기통처럼 다뤄지는 일기장이야말로 제 문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도와주는, 일종의 ‘생각의 시각화 도구’라고 믿었습니다. 마음을 털어놓는 글쓰기 과정은 누구에게 비밀을 고백하는 것처럼 속 시원한 느낌을 주기도 하고, 글로 쓰면 생각들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서 객관적으로 보이기도 하니까요.


감정 쓰기는 단순히 느낀 것을 적는 것이 아니라, 모호한 감정을 표현할 단어를 찾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감정을 일으킨 원인을 설명하며 인과관계를 정리하게 되지요. 결국 우리는 생각을 글로 옮기는 과정에서 이미 감정을 정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내 안에 떠오른 감정은 이런 것이다!"라고 정의하는 순간, 감정은 글자가 되고, 흐트러졌던 마음은 자연스럽게 정돈됩니다.


글로 쓰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습니다.

아무리 쓰고 정리해도, 감정과 생각은 끊임없이 다시 생겨났습니다. 하나를 정리하고 나면 그다음 생각, 또 다른 감정들이 끝없이 차례를 기다리는 것처럼 이어졌습니다. 오늘 정리한 이 감정도 단 하나의 작은 계기만 있으면 다시금 고개를 들었고요. 처음에는 '나는 원래 생각이 많은 사람이라서 그렇다'고 치부했습니다. MBTI에서 N 성향이 강한 사람들의 특징이라고도 하고, 어쩔 수 없는 본성이라고도 여겼습니다.

그렇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저는 "괜찮겠지" 하며 덮어둔 뚜껑 안에 온갖 곰팡이와 곪아버린 것들이 뒤엉켜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쓰기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요.


얼마 전, 생각이 많아 고생하는 저 자신을 위해 무지 노트를 직접 만들어 선물했습니다. 처음 만들어본 수제 노트라 약간의 설렘을 담아, 이 안에 많은 생각들을 자유롭게 적으며 나중에 책 소재로 활용해야겠다는 기대감도 있었지요. 설레는 마음으로 노트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어느덧 20페이지 정도를 채웠습니다. 그런데 노트를 채워도 채워도 저는 여전히 힘들어하고 있었고, 생각을 정리한 뒤에도 개운함이나 해방감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생각을 쓰는 행위에만 매몰되어 그냥 흘려보내도 되는 것들까지 붙잡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제서야 저는 생각을 붙잡는 이 행위가 제게 큰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물론 긍정적인 효과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노트에 "힘내자, 다시 잘해보자"라는 격려의 글을 적으며 잠시나마 의지를 다질 수 있었고, 제가 쓴 문장을 되짚어보며 스스로를 북돋우는 순간도 분명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감정을 쏟아내는 이 과정이 결국 제가 그 생각들에 더 깊이 잠식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떠오르는 것을 흘려보내는 연습

생각은 끝이 없습니다. 느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며, 그 본능에 이끌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생각과 감정을 집요하게 붙잡지 않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떠오르는 모든 감정과 생각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흘려보낼 때 비로소 우리는 생각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직접 만들었던 생각 노트는 점차 쓰는 횟수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떠오르는 것을 잡지 않고 그대로 흘려보내고 나니, 남는 것은 고요한 내면뿐이었습니다. 화가 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화가 난 순간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감정을 붙잡고 계속 곱씹지 않으니, 생각보다 금방 마음이 차분해졌습니다.

쓰지 않아도 이렇게 정리가 되다니, 저는 ‘써야만 한다’는 강박에 스스로를 옥죄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지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흘려보내는 연습을 반복하다 보니, 재미있게도 저는 저의 관찰자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떠오르는 감정과 생각을 그저 바라보는 시선으로 대하면 어느새 주변으로 시야가 넓어지고, 저는 그 안에서 아주 작은 존재로 느껴졌습니다. 그 작은 제가 아무리 떠들어봤자 소리도 미미하고, 세상에 미치는 영향도 거의 없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 소리마저 흘려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하자 고요함이 찾아왔고, 그 고요함 속에서 저는 소소한 자유를 느꼈습니다. 무언가를 비워낸 듯한, 가볍고 홀가분한 해방감이었지요.


고요함에서 찾은 자유

물론 일기를 쓰지 않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기록하는 것을 여전히 좋아하고, 아마도 할머니가 되어서까지 계속 쓸 것입니다. 다만 이제는 일기장에 자기연민, 분노, 괴로움을 붙잡아 두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생각과 감정이 일어나는 순간 그것을 그대로 바라보고 흘려보낼 수 있는 여유가 생겼기 때문에, 이제 저는 ‘써야만 한다’는 강박 대신, ‘굳이 잡지 않아도 괜찮다’는 자유로움에 더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쓰기 위해 애쓰지 않고, 과거와 미래에 집착하지 않는 순간이 늘어날수록 마음은 한층 더 고요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고요함 속에서 비로소 저 자신을 더 선명히 들여다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자유롭고 싶다면, 잡지 않습니다.

무심히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을 기꺼이 흘려보낼 때, 우리는 복잡한 마음의 소음에 휩쓸리지 않고 진정한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게 바로 고요함에서 찾은 자유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