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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도수 May 04. 2023

나는요 붕괴되기 싫어요.

나는요 붕괴되기 싫어요.


  무언가에 중독된 사람은 대체로 본인이 중독됐다는 자각조차 하지 못한다. 담배에 중독된 사람들은 자기는 마음만 먹으면 담배쯤은 쉽게 끊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고, 술에 중독된 사람들은 중독까진 아니고 그냥 가볍게 반주 정도 즐기는 수준이라고 우긴다. 그래서 중독 치료의 첫 단계는 본인이 중독된 상태라는 걸 인정하는 거란다. 나도 무언가에 중독된 상태를 내내 부정하다가 비로소 인정하는 첫 단계를 최근에야 넘었다. 내가 중독된 것은 담배도 아니고 알콜도 아니요, 바로 ‘성취’ 그 자체이다.


  성취에 중독되었다는 건 소위 말하는 워커홀릭과는 좀 다르다. 물론 대부분의 성취 중독자가 워커홀릭일 가능성이 높겠지만 단순히 직장에서의 모습만으론 판단하기 어렵다. 성취주의자는 성취를 위해 투신할 곳을 찾아 헤맨다. 커리어, 취미, 육아... 자신의 모든 시간과 체력을 투신할 곳을 찾아야지만 제 삶이 의미를 찾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내가 성취에 중독되었다는 건 펜싱을 하다가 처음 깨달았다. 대학시절 학교 수업으로 펜싱을 처음 시작했는데 종강한 후에는 돈이 궁해 펜싱클럽에 따로 등록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나중에 졸업하고 돈 벌기 시작하면 꼭 펜싱을 취미로 삼아야지’ 다짐했더랬다. 직장인이 되고도 몇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펜싱클럽에 등록했다. 학교 수업으로 듣던 때보다 훈련량도 훨씬 많았고, 치루는 경기 수도 정말 많았다.


  코치님과 훈련을 하면 할수록 승부욕이 더 생겼고, 이기는 경기가 많아질수록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로 기뻤고, 실력이 향상되는 게 느껴질 때마다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그런데 그런 감정들엔 이내 재가 뿌려지곤 했다. 이런 생각들이 곧바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부터 펜싱 배워서 올림픽 나가서 국위선양 할 것도 아닌데, 이렇게 해서 뭐해?’

  ‘이 시간에 헬스장 가서 근육을 키우면 나중에 늙어서 사는데에 도움이라도 될 텐데, 이건 내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되지?’

  ‘지금 이 나이 땐 커리어에 집중해야 하는 거 아닐까? 내가 이렇게 놀고 있을 때가 아닌데...’


   분명 펜싱클럽에서 경기를 치룰 땐 너무 재밌어서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다가도, 코치님이 “자 오늘 마무리하겠습니다”라고 말하자마자 급격하게 현실로 돌아와 회의감이 밀려드는 식이었다. 이대로 펜싱에 더 재미를 붙였다가는 ‘이런 무의미한 칼싸움 따위로 여생을 낭비하겠구나’ 싶었다. 시간낭비를 하다가 무가치한 30대를 보내다가 최종적으로 나 역시도 무가치한 사람이 될까봐 두려웠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려면 고작 칼싸움 따위는 그만둬야 했다. 


  친구들을 만나 근황을 나눌 때에도 이 양가적인 감정이 모두 튀어나왔다. 펜싱을 다시 배워서 너무 재밌고 신나는데, 인생 전체로 두고보면 시간낭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자기발전에 쓰는 게 아니라, 유흥과 오락에 쓰는 것 같아서였다. 그럴 때마다 꼭 핀잔을 들었다. 

  “펜싱 하는 동안 네가 행복하면 됐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거 아니야?”

  겉으로는 수긍하는 척 했지만 속으로는 납득하지 못하고 뾰로통했다. 

  ‘네가 취미로 하는 요가는 정신 수양에 도움이 되고, 네가 하는 헬스와 유산소는 체력과 근육을 키워 생활에 도움이 되고, 또 네가 하는 새벽수영은 부지런한 생활을 가능하게 하고 심폐능력을 키우는데 도움이 되니까 의미 있겠지. 하지만 펜싱은 괜히 칼에 찔려서 온몸에 멍이나 들고, 비대칭 운동이라 나중에 고관절에 안 좋다고 하고, 스텝을 밟다보면 발목 부상도 자주 당한다구! 오히려 건강엔 더 안 좋을 걸? 펜싱은 역시 시간낭비야.’


  이렇게 인생의 행복과 효율성이 따로 제 주장을 펼치던 때, 나는 성취주의자답게 해법을 찾았다. 펜싱을 그만두긴 아쉽고, 펜싱을 배우는 시간이 무가치한 시간낭비도 아니게 할 유일한 방법! 아마추어 선수권대회에 출전해 메달을 따는 것이다! 그렇다면 펜싱도 내게 한 가지 경력으로 남을테고, 내가 아마추어들 중에서는 수준급이라는 증명이 될테고, 결과적으로 이 시기를 돌이켜볼 때 칼싸움에 시간낭비를 했다고 느껴지진 않을 것이다. 그 이후 코치들이 수강생들을 부러 자극하려고 하는 말, 이를테면 “이래가지고 대회 나갈 수 있겠어요? 메달 딸 수 있겠어요?”같은 말에 나는 마리오네트처럼 완벽하게 종속되어 땀 흘리며 연습에 매진했다. 그 즈음 자각했던 것 같다. 내가 성취에, 그리고 그 성취의 증명에 중독되어 있다는 것을. 


  나는 늘 눈에 보이는 성취, 손에 잡히는 성취가 중요했다. 계량하여 증명이 가능한 성취 말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얻어내는 불특정 다수의 공인公認에 중독되어있었다. 공부를 하면 으레 성적으로 증명되어 전교 등수로 공인받았고, 취업준비를 할 땐 또 합격으로 증명되어 직업으로 공인받았다. 어렸을 때 취미로 악기나 운동을 배울 때도 그랬다. 열심히 한다는 칭찬보다는 소질 있다는 칭찬이 더 듣기 좋았고, 취미에 불과할 뿐인데도 남들보다 눈에 띄게 월등한 퍼포먼스를 내는 것들만을 지속했다. 내가 잘하지 못하면서도 즐거워했던 취미는 단 한 가지도 없다.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따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난 그냥 내가 잘하는 걸 좋아했다. 가령, 성적이 두드러지게 잘나오는 수학이나 남들보다 월등히 빠른 속도가 나오는 수영을 좋아했다. 아니 그냥 좋아하는 셈 쳤다. 


  누구는 ‘사람들 눈에는 안보일지라도 내가 아는 게 중요하다’며 보이지도 않는 의자 밑바닥 페인트칠을 그렇게 열심히 했다던데, 나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다. 누가 나한테 의자를 만들라고 시키면, 정성껏 의자 밑바닥을 칠하면서가 아니라 시간을 ‘효율적으로’ 쪼개서 많은 개수의 의자를 제작하는 데에서 희열을 느꼈을 거라고 100% 확신한다. 아주 그냥 ‘국내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최단 시간에 의자를 제작하자!’는 목표만 섰다 하면 한반도의 제일가는 의자왕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2010년대에 사회학을 전공한 사람이 누구나 그렇듯, 여즉 대부분의 사회문제를 신자유주의 탓으로 귀인하곤 했다. “이 모든 게 다 신자유주의 때문이야.” 이건 사회학 전공생들의 슬프고 거친 농담이었다. 지금 와 반성하자면 더 세밀하고 정교한 언어가 필요한 현상에도 신자유주의 때문이라고 진단하며 눙쳤던 때도 많다. 하여 그 단어를 또다시 오남용하고 싶진 않은데 이번엔 어쩔 수 없다. 아무래도 내가 성취에 중독된 것도 그 신자유주의 때문인 것 같다. 사회비평가 한병철은 <리추얼의 종말>에서 이렇게 썼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모든 각자를 자기 자신의 생산자로서 개별화함으로써… 더 많은 성과를 낼수록 성과주체는 더 많은 자아를 획득한다… 사람들은 자기를 실현한다고 믿으면서 자유의지로 자기를 착취한다… 나르시시즘적 성과주체는 자유의지와 열정으로 자기를 착취하여 결국 붕괴한다. 그 주체의 좌절을 일컬어 우울 혹은 ‘번아웃’ 이라고 한다. 


  나 같은 애들은 절대 명상이나 마음돌보기 같은 걸로 이런 걸 깨달을 수 없다. 명상 같은 걸 하라고 하면 명상시간 내내 ‘명상을 잘 하려면 혹은 효율적으로 하려면 지금 어떤 생각을 해야할까?’ 같은 생각만 할 게 빤하다. 그래서 혼자서는 절대 깨닫지 못하고, 꼭 힐난하고 혼내는 것 같은 책으로 두들겨 맞아야지만 정신을 차린다. 책도 책 나름이다. 사실 난 문학을 읽을 때 가장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문학을 붙들고 있으면 스스로가 왠지 향락에 빠져 시간을 낭비하는 탕아처럼 느껴진다. 문학에서의 메시지란 직접적으로가 아니라 비유적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니 ‘효율적이지 않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반면에 과학책과 역사책, 사회학·철학 책을 읽을 땐 괜찮았다. 내가 무언가 배우거나, 새로 깨닫거나, 반성한다는 건 자기발전을 위해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거니까. 


  하여튼 한병철의 책으로 그렇게 두들겨 맞고 나니 그 전까진 뿌옇게 정체를 가늠할 수 없던 것들의 실체가 명확하게 보였다. 내가 평생동안 획득한 자아는 온통 성과주체로서의 자아뿐이었다! 심지어 내 자유의지로 열정을 발휘해 스스로를 착취한 결과라서 딱히 원망할 대상도 없었다. 저자의 말을 빌자면 이대로 쭉 살다가는 결국 붕괴하고 말 것이다. 나는 붕괴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성과주체로, 그러니까 성취에 중독된 채로 사는 삶에서 벗어나야 했다. 


  이 결심을 우선 고백했다.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한 친구에게 였다. 

  “좀 부끄러운 얘긴데 이젠 달라질 결심을 했으니까 너한테만 얘기해줄게. 얼마 전에 문득 내가 성취에 중독돼서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리는 성취주의자로 살아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한심하게 생각하면 어쩌나 싶어 조심스럽게 얘기했고 친구는 놀란 표정으로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괜히 더 창피해져서 너스레를 떨었다. 

  “야, 뭐 이게 그 정도로 놀랄 일이냐?”

  “아니, 난 지금 네가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는 사실에 놀란 거야.”

  “너는 그럼 내가 성취주의자인걸 알았어? 어떻게 알았어? 난 이제야 알았는데?”

  “네 친구들 아무나 붙들고 물어봐봐. 너 빼고 다 알았을 걸?”


  사실 친구에게 고백하기도 망설여졌었다. 여태 성취에 중독되어 살아왔다고 고백하는 사람 치고 딱히 인생에 유의미한 성취를 해낸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친구는 그 마저도 너무 성취주의자 같다며 비웃었다. 나는 이제는 달라질 거라고, 꼭 다르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야 말겠다고 소리 높여 강조했다. 친구는 그 결심조차도 너무나 성취주의자 같다고 또 비웃었다. 

  “어, 네 결심을 반드시 성취하길 바란다.”

  대충 응원으로 받아들였다.  


  나는 이제 그냥 펜싱을 하는 시간 동안 즐겁다는 이유로 펜싱을 한다. 대회에 나가든 못나가든, 메달을 따든 말든, 나중에 골반이 틀어지고 고관절이 삐걱대서 후회하든 내 알 바 아니다. 솔직히 이 모든 건 아직 걸음마 단계의 결심에 불과하다. 내 결심을 성취해내고 말겠다는 일념으로 뇌에 힘주고 버티고 있다. 그래도 달라진 건 분명히 있다. 펜싱 클럽 문을 들어서기 전부터, 그리고 그 클럽을 나오고 나서도 회의감 대신 즐거움을 누리는 시간이 조금 더 길어졌다. 내가 내 즐거움에 재를 뿌리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므로, 내가 재를 뿌리지 않자 아무도 내게 재를 뿌리지 않았다.  


  즐거움을 누리기로 결심하고 달라진 건 비단 취미생활 뿐이 아니다. 그간 나는 회사에서도 늘 초조하고 불안했다. 사람들이 라디오PD는 이제 한 물 가지 않았느냐고, 이렇게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너도 새로운 일을 찾아봐야 하지 않겠냐고 반응했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안 좋았다. 이런 시대에 라디오에 몸담고 있는 게 도태를 자처하는 선택 같이 느껴졌고, 이 선택이 곧 인생의 실패로 귀결될까봐 두려웠다.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제작에 더 목을 맸고, 대세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을 작은 성취에 일희일비 했다. 새로운 기획을 실현하는 데에도 강박에 가까운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라디오국에서 가장 일이 많은 프로그램 <컬투쇼>를 연출하는 와중에 팟캐스트 <빅 리틀 라이프>를 제작한 것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즐겁다는 것만으로도 썩 괜찮은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내가 어떨 때에 즐거워하는지를 생각해봤다. 난 제작진과 매일 새로운 코너를 짜는 일이 재밌다. 선곡할 때 지금의 조명, 온도, 습도에 기가 막히게 잘 들어맞는 노래가 떠오르면 그렇게 짜릿할 수가 없다. 내 방송에 문자로 좋은 반응이 올 땐 정말 신이 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같은 시간에 불특정 다수와 같은 음악, 같은 이야기를 듣고 있단 사실에 매번 감동한다. 이 우연히 여전히 낭만적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만족감을 느낀다. 


  물론 문득 초조하고 불안할 때가 있다. 그러면 스스로를 갈아 넣더라도 새로운 무언가를 더 시도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럴 땐 한번 쯤 억지로 생각한다. 이것이 마냥 성취만을 위한 시도인지, 그 과정에서 내가 즐거울 수 있는 시도인지 말이다. 물론 그런 생각을 거친다고 해서 할지말지의 결정이 달라진 적이 없다는 게 함정이라면 함정이겠지만... 무작정 경주마처럼 달려들지 않고 한 번 멈춰서 내 선택을 돌이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있지 않을까? 어차피 자기 착취의 결과는 붕괴 뿐이라고, 성과에 중독되지 말라며 쓴소리를 한 장본인인 저자 한병철조차도 매년 책을 두 권씩이나 내고 있지 않나.   


  얼마 전 회사 후배와 저녁을 먹는데 갑자기 자기가 목표를 달성하는 삶에만 익숙해진 것 같다고 토로했다. 나는 짐짓 선배인 척 “프로그램 제작할 때 청취율에 목매게 되는 건 PD로서 어쩔 수 없다”고 위로했는데 단순히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란다. 자기는 며칠 뒤에 바디프로필을 찍겠다는 목표 없이는 헬스장에 갈 의지가 안 생기고, 목적지가 없는 드라이브 같은 건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단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살면 불행할 것 같단다. 그냥 운동을 하는 행위 자체에 행복하고, 좋은 음악을 들으며 운전을 하는 것 자체에 해방감을 느끼는 사람이고 싶단다. 이 영민한 후배는 나보다 어린 나이에 자신의 붕괴를 본능적으로 예감한 모양이었다. 


  중독자 모임에 몇 개월 일찍 들어와 적응한 (하지만 본인도 아직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처럼 말해줬다. 영민한 후배야, 금연하는 사람들이 어느 한 순간에 거짓말처럼 금연을 하게 되는 줄 아니? 아니다 금연은 매 순간 다짐해야 하는 거란다. 담배의 유혹에 흔들릴 때마다, 혹은 유혹에 넘어갔더래도 다시 처음처럼 금연을 결심해야지만 마침내 벗어날 수 있단다. 아마 성취에 중독된 자들도 매번 성취 지향적으로 살지 않겠다고 결심해야지만 그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며 나도 다시 한 번 다짐을 되새겼다.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타고나기를 현재의 즐거움에 흠뻑 취할 줄 아는 사람들, 누군가 목표를 제시해도 경주마처럼 달리기보단 천천히 주변 풍광을 둘러보는 사람들도 분명 있다. 이들은 성취 중독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다. 타고나길 목표와 효율성에 쉽게 추동되는 성취주의자들은 애써 노력해서 즐거움을 향유하는 수밖에 없다. 물론 가끔은 잠시 정신을 놓고 습관처럼 자기를 착취해내서 만들어내는 성취에 얼큰하게 취하게 되는 때도 있을 거다. 하지만 진정 담배를 끊으려면 술자리 분위기에 취해 어쩌다 한 번 담배에 입을 댔더라도 다음날 다시 금연을 결심해야만 하듯 우리도 다시 결심하면 된다. 현재의 즐거움을 향유할 결심. 성취에 중독된 삶과 헤어질 결심. 우리가 뭐 대단한 사랑을 하는 박해일도 아니고, 이렇게 자기착취 하다가 허망하게 붕괴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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