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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도수 May 04. 2023

삶의 맥락

  여성주의, 그러니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페미니즘’이라는 것을 나는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처음 알게 되었다. 외부 강사를 초청한 여성학 세미나에서 처음 접했는데, 그 순간은 뭐랄까, 내가 여태까지 두 발 딛고 서있던 지평 자체가 완전히 확장되는 그런 느낌이었다. 한발짝 떼자마자 등 뒤로 세계의 문이 닫히고 눈앞에 새로운 문이 열렸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망원경을 처음 선물 받은 아이처럼 황홀경에 빠져 나는 매 순간 그 렌즈를 눈에서 떼지 않고 만물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내 유별난 예민함 때문이라고만 여겨왔던 불편한 순간들의 근원을 명확하게 알게 되는 경험을 하다보니 푹 빠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 지적인 자극에 취했다. 모든 것이 문제적으로 느껴졌다. 거슬리지 않는 대화가 없었다. TV를 봐도, 책을 봐도 멍청한 소리가 포함되지 않은 것은 없었다. 가장 이물감이 느껴지는 순간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었다. 오히려 가족들에게 실망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명절에 마주하는 할머니의 손자위주 사랑법이나, 평소엔 그러지 않으면서도 명절 때만 되면 당연하다는 듯이 부엌에서 집안일에 하루를 바치는 엄마나, 그럴 때면 남동생이 거실에서 남성 가족들과 모여 TV를 보는 것도 유난히 얄미워보여 괜히 등짝을 한 대씩 때리기도 했다. 밥상 위에서 정답게 오고가는 가족들의 여성혐오적 발언, 뭐 그런 것들.. 아마 당신들도 한 번씩은 겪었을 그런 것들에 이물감이 느껴졌다. 


  여성학과 인류학을 가르치시는 교수님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강의실에서가 아니라 아마 건물 앞에서였으니, 지난 주 명절동안 서로의 안녕을 살폈을 것이다. 그 날 아마 나는 추석이 지나고 돌아와, 여러 가지 불만을 토로했을 것이다. 내 가족, 특히 여성인 가족들의 답답한 행동들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 조금 더 강도 높은 비판을 쏟아냈을지도 모른다.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정말이지 그 때 그들이 멍청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 때 교수님이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무 부끄러운 기억인 탓에 앞 뒤 문장은 기억나지 않고 오직 이 문장만이 가슴에 콕 박혔다. 어휴 창피해.


  “서연아, 사람들에게는 각자 삶의 맥락이라는 게 있단다.”


  다정한 목소리였지만 그 어떤 소란스러운 샤우팅보다도 엄중한 훈계였다. 


  그 때부터 나는 ‘삶의 맥락’이라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자 했다. 삶의 맥락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설명하라면 아직도 잘은 모르겠다. 다만, 맥락을 따진다는 것은 그 사람과 삶을 존중한다는 정도의 의미로 소화하고 있다. 그들은 나보다 못해도 서른살 마흔살 씩은 많은 분들이다. 나보다 훨씬 더 가부장적인 시대를 살아온 사람이다. 내가 책에서 읽은 역사의 증언들을 실제 귀로 받아내고 눈으로 훑어낸 사람들이다. 내가 받은 교육과 그들이 받은 교육은 엄연히 다르다. 심지어 지금 내가 받고 있는 ‘선진적’인 교육은 결국 그들 희생의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내가 그들을 ‘여성주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고 비판하는 것이 여성주의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오히려 광의의 의미에서 내가 좇고자 했던 여성주의적 가치는 그들의 삶의 맥락 위에서 현재 행동을 이해하는 것이 보다 본질에 가까울 수도 있겠다. 그러면 화가 나는 대신 슬퍼진다. 불만을 갖기보단 연민을 갖게 된다. 연민이 뭐 피차 유쾌한 감정은 아니라지만 그런 감정이 드는 걸 어떡해. 그러다보면 명절 풍경을 견디다 못해 주섬주섬 책을 싸서 집 앞 스벅으로 나혼자 피신하는 것이 아니라, 할머니 엄마 이모들을 데리고 탈출해서 여자들끼리의 깜짝 여행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도 나에게 결혼은 언제 할거니, 하루라도 젊을 때 아이를 낳아야지 하는 할머니를 바라본다. 나는 사는 날이 얼마 남지 않은 할머니에게, ‘할머니 이건 되게 가부장적인 소리야’라고 지적하는 대신 그녀의 품에 파고들어 우리 그런 재미없는 소리 말고 산책이나 나가자고 조르는 사람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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