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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지나간 자리에서 피어나는 것들

우리가 살아낸 모든 순간에는 바람이 불었다

by 도토리샘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무엇이 남을까. 때로는 혼돈이, 때로는 평화가, 그리고 때로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하지만 그 자리에는 분명 무언가의 흔적이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그것을 나는 오늘 이야기하려 한다.


어린 시절, 나는 종종 마당에 앉아 바람을 기다리곤 했다. 할머니께서 빨래를 널어놓으신 날이면 더욱 그랬다. 하얀 이불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은 마치 구름을 타고 날아가는 용과도 같았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이불은 춤을 추었고, 그 춤사위는 매번 달랐다. 같은 바람이 불어와도, 같은 이불이 걸려있어도, 그 움직임은 늘 새로웠다.


계절마다 바람은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봄바람은 꽃잎을 데리고 와서 정원에 꽃비를 내렸다. 벚꽃 잎이 흩날리는 날이면 마치 분홍빛 눈이 내리는 것 같았다. 그 자리에는 봄의 설렘과 생명의 환희가 남았다. 여름바람은 뜨거운 햇살 사이로 불어와 잠시나마 더위를 식혀주었다. 그 자리에는 시원함과 안도의 한숨이 남았다.


가을바람은 낙엽을 쓸고 지나갔다.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은 마치 자연의 대청소 같았다. 그 자리에는 변화와 무상함의 철학이 남았다. 겨울바람은 차가움과 함께 찾아왔다. 매서운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고독과 침묵이 남았지만, 그 속에서도 따뜻한 봄을 기다리는 희망이 움텄다.


사람들은 종종 바람을 헛된 것의 비유로 사용한다. "바람 같은 인생", "바람처럼 스쳐 지나간 사랑" 등의 표현이 그렇다. 하지만 나는 바람이 결코 헛되지 않다고 생각한다. 바람은 씨앗을 날려 새로운 생명이 피어나게 하고, 더운 열기를 식혀주며, 구름을 움직여 비를 내리게 한다. 때로는 거센 폭풍우가 되어 모든 것을 쓸어가기도 하지만, 그 자리에 새로운 시작을 위한 빈 공간을 만들어준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삶에 불어오는 수많은 바람들. 때로는 따뜻하게, 때로는 차갑게 불어오는 그 바람들은 모두 우리를 어딘가로 이끈다. 순간은 힘들고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그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항상 무언가가 남는다. 깨달음이 될 수도 있고, 성장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그리움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종종 인생의 큰 전환점에서 바람을 떠올린다. 대학에 입학하던 날, 첫 직장에 출근하던 날,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던 날. 그 모든 순간에는 바람이 불었다. 어떤 날은 따스한 봄바람처럼 희망을 가져다주었고, 어떤 날은 차가운 겨울바람처럼 시련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그 모든 바람은 내 인생의 일부가 되었고, 지금의 나를 만들어주었다.


특히 이별의 순간에 부는 바람은 유독 기억에 남는다. 떠나보내는 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느끼는 바람은 마치 시간을 멈추게 만드는 것 같다. 그 자리에는 아픔과 후회, 그리고 미련이 남는다.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하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새로운 씨앗이 뿌려지듯, 이별 후의 빈자리에도 새로운 만남을 위한 가능성이 심어진다.


때로는 바람이 지나간 자리를 되돌아보는 것이 두렵다. 폭풍이 할퀴고 간 자리에는 상처가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자리에는 항상 회복의 기적이 일어난다. 쓰러진 나무는 다시 싹을 틔우고, 날아간 지붕은 더 단단하게 재건된다. 삶도 마찬가지다. 시련의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항상 새로운 희망이 자라난다.


바람은 또한 우리에게 겸손을 가르쳐준다. 아무리 큰 나무라도 바람 앞에서는 휘어질 수밖에 없듯이, 우리도 인생의 바람 앞에서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휘어지되 부러지지 않는 대나무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그런 깨달음이 남는다.


지금도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따스한 봄바람으로, 누군가에게는 차가운 겨울바람으로 다가갈 것이다. 하지만 그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반드시 무언가가 남을 것이다. 그것이 눈물이든, 미소든, 혹은 깊은 한숨이든 말이다.


나는 이제 바람이 지나간 자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곳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발견하기를 기대한다. 때로는 아프고, 때로는 달콤하며, 때로는 쓸쓸한 그 이야기들이 모여 우리의 인생이 되니까.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언제나 우리의 이야기가 남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바람을 맞이한다. 그것이 어떤 바람이든, 그것이 남길 이야기가 궁금하기 때문이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서 피어날 새로운 이야기를 기대하며, 나는 창을 활짝 열어둔다. 그리고 기다린다, 다음 바람이 전해올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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