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오늘 날씨는 맑음
언제부턴가 건물 화장실의 세면대 수압이 낮아졌다. 아마 사람들은 잘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민감한 나는 바로 알아차리고 말았다. 그 이후 쫄쫄 흘러나오는 물줄기 덕분에 양치나 손 씻는 시간이 이전보다 오래 걸렸고, 성격이 급한 나는 그 상황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상온에서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리는 속도로 손의 거품이 씻겨 내려가기를 기다려야 하다니! 나는 아이스크림도 씹어먹는 사람인데 말이다.
알아보니 수압조절은 ESG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항의할 논리조차 잃게 되었고, 더 더 남몰래 짜증을 혼자 삭힐 수밖에 없었다. 양치를 위해 물을 입에 채우는데 수십 초가 걸리다니 이게 말이 되나? 그런 상황이다 보니 치약과 거품비누를 더 조금 사용하게 되어버렸는데... 아뿔싸 이것도 ESG 달성을 위해 계획된 음모의 기대된 나비효과였던 건가?
내가 거기까지 알아챌 줄은 몰랐겠지.
나도 내가 그럴 줄은 몰랐다. 어쨌든 작전 간파 이후 나는 치약을 칫솔의 솔 부분에 이중으로 짜고, 거품 비누를 양 손바닥에 가득 담아 문지르기 시작했다. 적군의 의도를 알아채고 슬기롭게 그들의 목표 달성을 방해하는 지능적 전략에 스스로 감탄했다. '맥아더 장군이 인천에 상륙했던 전략이 바로 이런 거잖아?'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했다. ESG를 달성하기 위해 입주자들을 꾀죄죄하고 불결하게 만들었던 건물주여. 나는 그 결정을 강력하게 규탄한다! 그리고, 이렇게 항쟁하고 있다!
하지만 세면 시간이 너무 지루해서 그 전략은 며칠 못 가고 말았다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