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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빨래하기(번외 편)

좌충우돌 샌프란 생존기

by Aprilamb

파리에 갔을 때 빨래 했던 기억



샌프란시스코에서도, 달나라에서도, 프랑스에서도 빨래는 해야 할 때가 오고 만다. 그래서,


빨래를 하러 나왔다.


숙소 근처의 코인 빨래방으로 들어가 벽에 붙어있는 가격표를 확인했다. 7킬로에 4유로, 10킬로에 5.5유로, 17킬로에 8유로라고 하는데 솔직히 키로수가 뭘 의미하는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저게 빨래의 무게를 의미한다면 4유로 만으로 내가 가지고 간 옷들을 모두 빨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세탁기도 두 종류밖에 없는데 왜 요금은 셋으로 나뉘어 있는 걸까? 난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빨래의 달인이었지만, 이 곳에서는 처음부터 그게 통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빨래의 양이 작으니 제일 작은 세탁기에 집어넣기로 했다. 그런데, 여기는 미국과는 좀 다르게 세탁기 앞에서 사용료를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세탁소 가장자리 벽에 붙어있는 자판기 같은 장치에서 모든 세탁기의 사용료 처리를 하고 있었다.


오옷. 네트워크를 활용한 중앙집중 컨트롤 장치!


불어를 모르니 사용 방법 자체를 파악할 수가 없어서 인터넷 사전으로 단어를 좀 찾아보려 했더니, 미국보다 더 거지 같은 인터넷은 도대체 터지지를 않는다. 이 곳 사람들은 대체 인터넷으로 뭘 할 수 있는 거지? 이미지 하나 없기로 소문난 구글 프런트페이지를 띄우는 데도 한나절이니 말이다. 어쨌든, 날카롭기로 유명한 내 센스를 활용할 수밖에 없다.


우선 세탁기마다 번호가 있는 것을 보니 중앙의 자판기 머신 같은 것에서 그 번호로 작동 세탁기를 인식하는 것 같다. 빨래를 가장 맘에 드는 머신에 때려 넣고는 기계에 동전을 넣으니 물어보는 것도 없이 쿨하게 바로 작동을 시작해버린다. 난 아직 세제도 넣지 않았는데 말이다. 갑작스러운 시작에 세제를 구매하려 하는데, 세제 구매 자판기를 찾을 수가 없다. 미국에는 옆에 따로 자판기가 있었다고!


진정하고 살펴보니 벽에 세제와 드라이 시트 선전 옆에 번호가 붙어있다. 놀랍게 빠른 눈치로 3분이 지난 상태에서 중앙 자판기 장치에서 겨우 세제를 구매했다. 세탁기 구동과 세제 구매를 한 머신으로 처리하다니 더럽게 효율적이면서 알아채기 힘든 시스템이다. 구매한 세제를 세탁기에 넣으려는데, 대체 입구가 어디지? 미국 세탁기는 앞쪽에 세제 넣는 입구가 있었는데, 그 부분은 맨질맨질 이음매 하나 없다. 짜증이 솟구치네. 아니 세제도 빨래 넣는 문으로 넣으라는 건가. 그렇다고 지금 문을 열수는 없다. 이미 우주공간에 진입한 우주선의 해치를 열 수 없듯이 말이다.


물로만 빨아도 빨래는 빨래인 건가?


뭐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하면서 세탁기 위에 두었던 빨래를 담아왔던 주머니를 들어보니 앗. 여기에 구멍이 있다. 그런데, 구멍이 두 개. 정말 폭발하기 일보 직전의 폭발물 앞에서 빨간 전선을 끊느냐 노란 전선을 끊느냐 고민하는 해체반 대원의 고통이 그대로 이해가 되는 순간이다.


자세히 보니 두 개가 아니라 네 개였다. Prelavage, Lavage, Assouplissant. Javel. 빨래는 이미 중반 단계로 미친 듯이 진입하고 있었다. 급한 마음에 세제 두 도막 중 하나는 prelavsge에, 나머지 하나는 lavage에 부셔 넣었다. 고체 세제라 뭔가 물이 흘러나와서 씻겨 내려가야 할 것 같은데 전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아. 그런데, 이해는 전혀 가지 않지만 조금 지나니 lavage에 있던 세제 쪽으로 물이 나와 그쪽에 있던 세제가 씻겨 내려갔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라도 들어갔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거품은 전혀 나지 않는다.


몰라. 어쨌든 세제는 투입되었으니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겠어.


빨래가 거의 다 끝나가는데 갑자기 화장실 물 내려가는 소리가 들려 살펴보니 Prelavage에 들어있던 세제가 씻겨 내려가고 있다. 아무런 지식이 없는 나지만 이건 뭔가 심각한 상황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인지할 수 있었다. 갑자기 거품으로 가득 차는 세탁기. 분명히 같은 세제인데 먼저 투입된 반쪽과는 반응이 전혀 달랐다. 엄청난 거품 속에서 갑자기 세탁기는 탈수 모드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그냥 이대로 건조해야 하는 운명인 건가?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어려운 결정 앞에 놓였던 적이 몇 번 없었던 것 같다. 눈 딱 감고 건조기에 털어놓을까 하다가 그냥 다시 처음부터 빨래를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삼십 분 더 쭈그리고 앉아있다가 나중에 편하게 옷을 입는 게 더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심한 세탁기는 4유로를 더 삼키고는 다시 처음부터 성실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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