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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방통 Oct 15. 2021

지구의 깊은 역사

지질학사는 이 한 권이면 충분함


“이 책을 통해 많은 사람이 인간 관념에 일어난 대혁명을 알고 이해할 뿐만 아니라, 케케묵은 구닥다리 발상도 몰아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특히 선과 악의 전통적 상징인 성 조지와 용처럼, 허상에 불과한 두 야수인 ‘과학’과 ‘종교’가 끝없이 충돌한다는 널리 퍼진 신화 말이다.”
마틴 러드윅/김준수 역, <지구의 깊은 역사> 18~19쪽.


한 달 전 성수동에서 열린 서울국제도서전을 찾았을 때, 동아시아 출판사 부스를 둘러보다 <지구의 깊은 역사>를 어떻게 출판하게 되었냐고 여쭤보았다. 담당 편집자는 계시지 않았지만 다른 분이 한양대 철학과의 이상욱 교수님이 이 책은 꼭 나와야 하는 책이라 강권해서 내게 되었다고 하셨다(이 분은 책 뒤에 추천사를 쓰시기도 했다).

이렇게 물어본 이유는 <지구의 깊은 역사>를 읽으면서, 이 책이 쉽게 출간되기 힘든 종류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마틴 러드윅이 누구인가. 지질학자이자 과학사학자로, 대학원의 과학사 통론 수업에서 그의 연구를 읽을 정도로 지질학사의 권위자 아닌가. 그가 정리한 지구의 역사의 역사에 대한 500쪽짜리 책이면 내용도 방대하고 쉽지도 않고 타겟 독자도 그리 많지는 않아 보인다. 그랬는데 역시나 과학철학 교수님이 번역 출간을 강권하셨구나. (교수님 잘하셨어요!)

러드윅은 서문에서 지질학의 발전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다윈의 진화론에 비할 정도로 인간을 겸손한 위치에 놓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고 주장한다. ‘지구의 깊은 역사’, 즉 지구의 역사가 인류의 역사보다 훨씬 길다는 시간 감각의 변화이다. 제임스 어셔가 발표한 그 유명한 기원전 4004년부터, 현대 지질학자들이 주장하는 45억 년 전이라는 수치에 이르기까지 지질학의 발전에 따라 지구의 역사는 엄청나게 확장되었고, 역사의 주인공이던 인류는 지구사의 끄트머리(12월 31일 오후 11시 59분 40초)에 겨우 나타난 존재로 격하된 것이다.

러드윅은 본문에서 지질학의 역사를 1장부터 11장까지 연대기 순으로 다룬다. 성서와 역사학의 영향으로 태어난 지질학이 발달하여 고생물학과 고인류학을 배태하는 순간, 판구조론이 인정을 받는 순간을 넘어 우주의 범위로 확장되기까지, 한 챕터 챕터가 단행본 한 권이 될 정도로 매우 방대한 분량인데 400쪽으로 어떻게든 정리했다는 사실이 감탄스럽다. 그 연대기를 이 독후 기록에서 다 읊을 수는 없으니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느껴 기록해두고 싶은 세 가지 결론을 정리한다.

(1)
"역사적 실재를 입증하는 일과 인과적 설명을 찾아내는 일의 구분에는 역사학 같은 과학Wissenschaften(학문이라는 의미에 가까운)과 물리학 같은 과학Naturwissenschaften(자연에 대한 여러 과학이라는 뜻의)의 차이가 놓여있다. 자연에 대한 과학과 인간에 대한 과학 모두 다양하다는 점을 온전히 인식하면 과학이 하나의 단일한 '과학적 방법'을 공유하고 있다거나 공유해야 한다는 잘못된 과정, ‘영어권 이단’이 떠받쳐온 단일한 ‘과학’이라는 이 가정이 부과하는 온갖 구속으로부터 과학을 해방시킬 수 있다." 428~429쪽(괄호 안은 수정됨).
책 초반부에서 저자는 지질학이라는 자연과학이 탄생하는 데에는 역사 기록과 (무엇보다) 성서를 중심으로 연대를 나열하는 역사연대학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현대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종교와 과학이 그리 멀지 않았음은 물론, 인간 과학과 자연 과학의 경계(싸게 말해 문과 대 이과)도 분명치 않았다는 것. 이런 스테레오타입을 허물고 생각하기를 바라는 과학사학자의 시각.

(2)
"최근 수십 년간 과학지식의 역사를 급진적 혁명과 공약 불가능한 '패러다임’(현재의 지적 담론에서 가장 남용되는 용어 중 하나다)의 연속이라고 묘사하는 것이 지적 유행이었다. …이런 모형이 지구과학 외의 분야에는 얼마나 들어맞는지 모르겠지만, 지구의 심원한 역사를 발견하는 과정에서는 얻을 수 있는 증거를 점점 더 만족스럽게 설명하는 재구성과 해석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뚜렷이 나타난다. 대체로 진보가 일어난 셈이다." 432쪽.
쿤의 패러다임 쉬프트가 지질학에도 적용되는지에 대한 러드윅의 견해. ㅋㅋㅋㅋㅋㅋㅋ

(3)
"과학자들은 과학자로서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종교 못지않게 악질의 근본주의를 퍼뜨리지 못하도록 다 함께 막는데 실패했음을 알아챘어야 했다. 진화론이라는 과학 이론을 무신론적 세계관으로 부당하게 확장한 사람들 말이다." 437쪽.
책 전체에서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는 러드윅이 과학에 대한 기존의 신화 무너뜨리기에 매우 적극적이라는 점이다. 그의 비판은 창조론자는 물론 과학을 종교에 대항하는 무기로 악용하는 (리처드 도킨스 식의) ‘과학 근본주의자’를 향하기도 한다. 이 대목은 그런 과학 근본주의자를 향한 비판이다.

분명 쉽지 않은 책이지만, 읽은 만큼 남는 것도 많은 책.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

지질학의 역사에 관심이 있으신 분.

다음 학기에 석사 1학기로 입학하는 과학사 전공자.

공룡과 사랑에 빠진 유년기를 보냈고 아직도 고생물학, 고인류학 뉴스에 귀가 기울여지는 지질학 매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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