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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방통 Dec 24. 2022

나는 천 권의 책을 읽었다

<키스는 키스, 한숨은 한숨>부터 <음악의 사물들>까지




12월 22일, 신예슬의 <음악의 사물들>을 읽었다. 워크룸프레스에서 만든 작고 아름다운 책으로, 작곡과 연주, 청취라는 음악 경험을 악보, 자동 악기, 음반이라는 세 사물과 기술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이 책이 내게 의미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이 책이 내가 읽고 기록한 천 번째 책이었기 때문이다.


독서 목록 만들기는 내가 가장 꾸준히 해온 일 중 하나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쓰기 시작해서 이제 18년 째다. 내용은 많지 않다. 몇 번째로 읽은 책이고, 제목과 저자와 읽은 날짜, 쪽수만 쓴다. 물론 처음 이 목록을 만들 때는 독후감도 다 남기겠다고 생각했었다. 1년을 해보니 전혀 쉽지 않은 원대한 희망이었음이 드러났다. 독후감을 써야 하니 다음 독서를 미루고, 본말이 전도되며 오히려 책을 적게 읽게 되었다. 그후로는 정말 가벼운 서지 정보만 남기기로 했다. 그 사소한 가벼움이 독서 목록을 꾸준히 쓸 수 있는 원동력이 된 것 같다.


지금 두 권의 독서 노트를 펼쳐보면 재밌는 점이 많다. 시기에 따라서 독서량이 얼마나 바뀌었는지도 볼 수 있고 내가 어떤 종류의 책을 읽기 시작했거나 관심을 끊었는지도 알 수 있다. 나는 군시절 2년 동안 313권의 책을 읽었는데, 이전 학부 시절 6년을 합친 것보다 많은 양이다. 혹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라틴 문학을 거의 읽지 않게 되었고, 대학원을 졸업하면서 예전보다 역사서를 더 읽게 되었다거나 하는 사항 말이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건 내 기억의 불완전함이다. 독서 노트에는 내가 자랑스레 읽은 책은 물론, 제목만 기억나는 책, 심지어 한 번도 읽거나 들은 적 없는 제목의 책들이 빼곡이 적혀 있다. 아하, <모비 딕>은 군대 있을 때 읽었었지. 내가 이기호의 <최순덕 성령충만기>를 읽었었다고? <멀티를 선물하는 남자>? 이건 무슨 책이야? ("강남 대치동 전설의 일타 강사이자 베스트셀러 소설가인 김진국 선생은...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섹스 패러다임으로 ‘멀티 오르가슴’을 제시한다." 출판사 소개 발췌) 이 기록은 독서의 경험이 쌓여 내가 된다는 생각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몇 년 전의 나는 완전한 타인의 모습으로 이곳에 기록되어 있다. 단지 나는 매순간 변화하는 존재이며, 책은 중간중간 찍힌 스틸컷 정도의 느낌. 

책으로 대표되는 나의 여정이 손바닥만한 수첩 한 권에, 물리적인 실재로 들어차있다는 점에서 이 독서 목록은 정말로 무서운 존재다. 나는 여기에 적힌 책의 반도 기억하지 못하는 채로, 토대를 얼기설기 얹고 비계도 제거하지 않은 불완전한 건물로 쌓여가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 독서 목록은 ‘지적 여정’ 보다는 그저 내가 스쳐 지나간 지식의 비명碑銘 정도로 의미짓는 게 온당할 성 싶다.


그러나 또한 다행이라면 다행인 점은, 나뿐만 아니라 이 아카이빙의 시도 자체도 불완전하다는 것일 테다. 이 목록에는 중학생 때 밤을 새워가며 읽었던 애거서 크리스티의 <0시를 향하여>도, 카잔차키스의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고려원 판본도 들어있지 않다(지금 생각하니 아쉽긴 하군). 어쨌든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단행본만 기록하기 때문에 대학원에서 선배들의 번역 한글 파일로 읽었던 <리바이어던과 공기 펌프>도 없다. 반대로 독서 목록을 만든다는 행위 자체가 '한 권을 통째 읽는' 방식으로 독서법을 한정짓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발췌독은 아직도 거북하고 느껴지고.


독서라는 행위가 양으로 환원되지 않는 종류의 것임을 알지만, 그럼에도 나는 지금까지 만난 천 권의 책이 뜻깊다. 단지 독서 경험에서 올라오는 뜻깊음은 아니다. 모든 독서와 아카이빙은 불완전한 시도라는 걸, 이 작은 노트를 기록하면서 알게 되었다. 하지만 불완전한 아카이빙을 통해 나의 생은 재구성된다. 이제 독서 기록은 내 내면의 서재가 되었다.

시간은 잘 간다. 새 밀레니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다음 천 권 만큼의 책을 언제까지 읽게 될 지 상상해본다. 지금의 속도로 읽는다면 쉰둘 정도가 될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삶은 더 바빠지고 재미있는 일들은 많이 생기고 눈은 더 침침해지겠지, 그러면 쉰 다섯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독서가 불러올 밀레니엄의 재밌는 점은 역법에 새겨진 연도와는 달리, 다가오는 시점을 오로지 내가 주체적으로 불러와야 한다는 점에 있다. 나는 앞으로도 책을 읽는 사람일까? 새로운 천 권을 만날 때까지 살아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을까?


내가 넘겼던 종이와 지나친 문장만큼, 앞으로도 나는 계속 달라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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