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첫 주의 음악, 에네스쿠의 피아노 사중주
얼마전의 일이다. 친구 하나가 트위터로 뜬금없이 에네스쿠라는 사람을 (마치 고등학교 동창이나 동네 친구를 대하는 투로)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에네스쿠면 아마도 루마니아 계통의 성일텐데 싶어어 왜 그러냐고 반문했더니 핫트랙스인가 어딘가의 매장에서 예쁜 커버의 클래식 음반을 발견했는데 거기에 죄르지 에네스쿠George Enescu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야, 역시 힙스터놈은 클래식도 다르게 듣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 친구는 취향의 전시장, 취향의 전쟁터같은 트위터 시장통에서도 ~내추럴 본 힙스터~로 소문난 친구였는데, 바흐에 베토벤, 슈만, 말러같은 전통적인 선택지도 많건만 하필 첫눈에 에네스쿠같은 작곡가를 고르느냐 이말이다. 장담컨대 이 친구는 마이너리티의 별자리의 가호 아래 태어났거나(마이너리티 별자리라서 보이지 않는다) 마이너리티 성자의 축일에 태어났을 것이다(역시 마이너리티 성자라서 아무도 모른다).
에네스쿠에 대해 계속 얘기해 보자면, 나는 친구에게 에네스쿠에 대해서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중반을 살다간 루마니아 출신의 작곡이며 루마니안 랩소디라는 곡이 유명하다는 정도밖에 모른다고 얘기했고, 음반에 대해서는 "커버가 예쁘면 내용물도 좋다"는 나의 미신을 알려주었다. 음악가와 내용물을 하나도 모르는 상태에서 커버만 보고 음반을 고르는 제식을 통해 언제나 새로운 음악과 만날 수 있었고, 지금까지는 이 믿음이 기대를 저버린적이 없었다고 말이다. 실로 그러한 것이, 나는 이 의식을 통하여 ECM에서 나온 체헤트마이어 쿼텟의 슈만 현악 사중주를 만났고 틴더스틱스의 <The Something Rain>을 만나지 않았던가(다행스럽게도 이 명제의 역은 성립하지 않는데, 그렇지 않았다면 라디오헤드의 <The Bends>나 앙드레 프레빈의 거슈윈 음반은 지구상에서 설 자리를 잃어버렸겠지).
얼마후 친구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인터넷으로 그 음반을 찾았는데, CPO 레이블에서 나온 타무즈 피아노 쿼텟의 에네스쿠 피아노 사중주라는 것이다. 애플 뮤직으로 들어보니 오오, 기대를 뛰어넘어 정말로 좋았다! 작곡할때 토속 멜로디를 많이 차용했다고 해서 내심 바르톡과 비슷한 느낌의 음악이려나 생각했는데, 에네스쿠는 루마니아의 산골보다는 파리의 우아함에 훨씬 가까웠다. 그의 음악은 19세기와 20세기의 중간에 걸쳐 있어 (톤 클러스터와 변박이 난무하는) 바르톡처럼 너무 생경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전세대의 위대한 작곡가들만큼 화성이 단정하지도 않았다. 나중에 찾아보니 포레 밑에서 작곡을 배웠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그 우아함이 한결 쉽게 이해되는 것이다.
비단 작곡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에네스쿠는 타고난 천재였다. 바이올리니스트로 가장 큰 명성을 날렸지만(제자로는 예후디 메뉴인(!)이 있다) 피아노에 있어서는 알프레드 코르토가(!) 그의 테크닉을 극찬할 정도였으며, 심지어는 지휘자의 소질을 갖추고 있어 토스카니니 이후의 뉴욕 필하모닉을 잠시 지휘하기도 했다. 하지만 위키를 뒤지면 알 수 있는 커리어의 나열들이 그의 음악에 대해 직접 말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 나는 에네스쿠의 피아노 사중주를 들으면서 '헝가리나 루마니아나 동유럽이면 거기서 거기'라는 안일한 사고를 바탕으로 바르톡을 연상했던 자만을 반성했다. "바르톡과 비슷한 시대의 작곡가"로, "바흐와 동시대 작곡가" 등의 수사로 내가 오해하거나 놓치게 되는 음악이 얼마나 많겠는가(물론 본국에서는 그의 이름을 딴 공항과 음악 축제가 있을 정도로 유명인사이기도 하지만, "영어로 된 에네스쿠에 대한 책이 없다"고 불평하는 2003년의 기사를 미루어 짐작해 보았을때 그의 음악은 생전의 찬란한 커리어에 비해 많이 덜 알려진 편이 맞기는 한가보다).
어쨌든 나의 훌륭한 친구 덕분에 6월의 첫주는 꼬박 에네스쿠를 들으면서 보낸다. 많은 음악을 들어왔고 그 기억들이 쌓일수록 새로운 음악이 필요치 않을지도 모른다는 염려스러운 자각이 들때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음악과의 조우는 아직까지는 내게 여전히 큰 기쁨을 가져다주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뮤즈의 최신작 앨범같은, 음악의 지도 위에 펼쳐진 수많은 함정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음악을 찾아듣는 이유이기도 할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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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짧은 단상이든 메모든, 어떤 형태가 되었든 간에 앞으로 다시 들은 음악에 대한 글을 써보려 한다. 꾸준히 여러 음악을 찾아 들으면서도 너무 오랫동안 그 기록을 갈무리하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바쁨을 핑계로 그 단상들을 흘려보내는 것은 내 일부분에 대한 직무유기라는 생각이 들었다(또한 결정적으로, 그다지 바쁘지도 않다!). 물론 나는 취미로 음악을 듣는 사람이고 학문적인 이해 없이 "화성이 단정하다"같은 표현을 쓰면서 죄책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굳이 알렉스 로스가 될 것이 아니라면 이 정도의 권한 남용은 괜찮지 않을까, 그런 변명으로 면피를 하면서 글을 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