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ngs for Lulu

5월 마지막 주의 음악, 루퍼스 웨인라이트

by 김방통

지난 토요일 드디어 루퍼스 웨인라이트를 만났다. 수업이다 군대다 이미 두 번의 내한공연을 놓친 상황에서 더 이상 우리나라에서 볼 기회가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4년 만에 다시 찾은 서울 재즈 페스티벌에서 그의 공연을 보게 된 것이다.

무대는 기타와 피아노로만 이루어지는 단출한 구성이었다. 나는 <Release the Stars> 투어 때처럼 꽉 찬 빅밴드 사운드를 기대했던지라 아쉬운 마음이 있었는데, 막상 공연이 시작되고 "Grey Gardens"를 노래하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아쉬움이 눈 녹듯 사라졌다. 아, 루퍼스는 목소리만으로 이 넓은 공간을 가득 채울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물론 루퍼스 웨인라이트는 목소리만으로 설명이 되는 뮤지션이 아니다. 그는 여덟 장의 정규앨범을 낸 가수이며, 재즈와 팝, 카바레와 오페라를 왔다 갔다 하면서 다양한 장르의 문법을 체득한 실력있는 싱어송라이터이며, 그러면서도 홀로 80분의 무대를 만들어내는 출중한 퍼포머이기도 하다. 한두 악기로 코드만 얼기설기 엮은 어쿠스틱 솔로 공연은 풍성한 음악에서 살을 발라낸 듯한 느낌을 주지만 그만큼 곡의 구조와 진행을 선명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뮤지션의 실력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겠는가. 싱어송라이터 루퍼스 웨인라이트의 작품은 그렇게 투명한 상태에서도 빛을 발하는 잘 만들어진 음악이었으며, 그 음악을 공연하는 퍼포머 루퍼스는 대단한 끼쟁이였다. 한곡 한곡을 부르고 나서 쉴 틈 없이 샤브샤브를 먹었다느니, 새 앨범이 나왔다느니, 한국 남자들이 아시아에서 가장 섹시하다(?)같은 잡담을 풀어놓는데 관객석에서 웃음이 끊일 새가 없었다.


그날 루퍼스 웨인라이트는 총 16곡의 노래를 들려주었다. 부틀렉과 앨범을 들으면서 셋리스트(http://www.setlist.fm/setlist/rufus-wainwright/2016/seoul-jazz-festival-seoul-south-korea-23fee4a3.html <= 내가 썼음!)를 복기하는데 내가 몰랐던 대부분의 곡들이 룰루 앨범의 수록곡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All Days Are Night: Songs for Lulu>는 오직 피아노와 목소리로만 열두 곡을 채운 앨범인데, 전후로 나온 그의 다른 앨범들에 비해 그렇게 눈에 띄는 작품은 아니다. 아마도 대편성 관현악을 덧입힌 <Release the Stars>나 마크 론슨과 함께한 <Out of the Game>에 비해 사운드가 단출하게 들렸을 수도 있고, 어머니의 죽음과 같은 정황이 음악의 배경에 드리운 우울함이 또 다른 이유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 어쨌든 발매 당시에 이 앨범은 엇갈린 평가를 받았고, 상업적으로도 크게 신통치는 않았다. 호평인 매체도 있었지만 피치포크는 겨우 3.9점을 주기도 했고.

(사실 나도 들으면서 여러 번 졸긴 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Songs for Lulu>는 피아노에 대한 루퍼스의 열정(혹은 야심)을 보여주는 색다른 매력을 가진 앨범이다. 전작에서 루퍼스 웨인라이트는 유려한 오케스트레이션과 아이디어의 차용을 통해 클래식에 대한 애정을 유감없이 드러내는데, 하바네라의 리듬을 가지고 온 "Vibrate"가 그렇고 볼레로를 통째로 삽입한 "Oh What a World"가 그렇다. 룰루 앨범에서 루퍼스는 피아노만을 이용하여 다른 악기의 공백을 메우며 오케스트라 못지 않은 폭넓은 사운드를 들려준다. 피아노는 이 앨범의 실질적 주인공이며 코드를 뒷받침하는 배경을 넘어 목소리와 동등하게, 가끔은 더 중요한 위치에서 무대의 전면에 등장한다. 최근 나온 앨범들 중 피아노라는 악기를 이렇게 열정적으로 파고드는 음악이 있었던가. 피아노와 목소리의 관계에 포커스를 맞추면서 <Songs for Lulu>는 가곡의 전통과도 맞닿는, 루퍼스의 디스코그라피 중에서도 가장 클래시컬한 앨범이 되었다. 다른 앨범들만큼 많이 듣지는 않았지만, 루퍼스 웨인라이트의 디스코그라피에서 룰루 앨범이 없었다면 나는 적잖게 슬펐으리라.


룰루 앨범의 곡들은 새로운 편곡으로 다른 작품에 등장하기도 하는데, "Les Feux D'artifice T'appellent"은 오페라 <Prima Donna>에, "Sonnet 20"은 A Woman's Face라는 부제를 달고 올해 나온 셰익스피어 기념 앨범 <Take All My Loves>에 수록되기도 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Prima Donna>와 <Take All My Loves> 둘 다 클래식 레이블인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발매되었다는 점인데, 클래식 뮤지션들은 루퍼스 웨인라이트의 행보를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한 대목이다.


끝나지 않을 것처럼 지루하게 이어지던 그저께 새벽에는 <Songs for Lulu>를 들으며 숙제를 하다 문득 생각이 나 아마존을 뒤져보았다. 역시나 <Songs for Lulu>의 악보집이 발매되어 있었다. 한숨 돌리는 여름에는 바흐와 루퍼스 웨인라이트를 연습해야겠다.


실컷 룰루 앨범 얘기를 해놓고 링크는 <Want One> 앨범의 오프닝 트랙인 "Oh What a World". 가장 듣고 싶은 곡 중 하나였는데 라이브에서 못들은 아쉬움에 올린다(또한 괜찮은 룰루 앨범의 유튜브 링크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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