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새벽배달
나는 일찍 돈 맛을 알았다.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는 늘 여자는 시집만 잘 가면 된다고 말씀하셨다. 딸들의 교육 따위는 관심 밖이었다. 나는 자매 중에 가장 공부를 못했지만, 기어코 대학에 갔다. 가부장적인 아버지에게 대항해 필사적으로 감행한 선택이었다. 직장에 다니며 집안에 경제적인 보탬을 담당하던 언니들에게 미안해 어떻게 해서든 스스로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고 싶었다.
대학교 수업 시간을 피해 아르바이트가 가능한 시간은 새벽이었다. 유독 아침잠이 많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새벽에 녹즙을 만들어 정부 청사로 배달하는 일을 시작했다. 원래는 배달만 하다가 사장님이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녹즙을 만들기까지 했다. 사장님은 모든 일을 온전히 아르바이트생에게 맡기는 게 미안했는지 월급을 올려 주었다. 나는 매일 새벽 4시 반까지 가게에 나가 채소와 과일을 다듬고 녹즙을 만들고 학교로 출발해야 했기 때문에, 8시 반에 맞춰 배달을 마쳤다. 몇 번의 배달 후 생긴 나름의 요령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 한 층씩 내려오며 배달했다.
이렇게 배달한 지 한 달 정도 지났을 무렵, 새 얼굴을 만났다. 오랜 출장 끝에 복귀하신 분 같았다. 나는 특유의 영업 기질로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얼른 포일에 포장한 사과 한 쪽과 녹즙 시음을 권했다.
“이거 한번 드셔보세요. 가장 인기있는 케일녹즙이에요. 몸에 좋은게 쓴 거 아시죠?
대신에 이 사과랑 같이 드세요.”
내심 ‘내일은 녹즙을 신청하지 않을까.’싶은 영업전략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말은 충격이었다.
“집이 어려운가봐? 예쁘장하게 생겨서는. 쯧쯧.”
웃음을 지으며 다음 집으로 내려가고 싶었는데 발이 얼어 붙었는지 꼼짝을 하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도 나는 부끄럽지 않았다. 집이 어려운 것 맞지만 나 예쁘장하게 생긴 것 맞고 매일 녹즙을 배달하면 녹즙 마시는 사람보다 건강해진다. 기죽을 이유가 없었다.
그날 이후 ‘기죽지 말자’가 내 인생 마법의 주문이 되었다. 쓰라린 소금 한 줌이 내 삶에 진짜 필요한 소금이 된 셈이다. 사실 사람들의 거친 말에 순간 발이 얼어 붙는 일은 그 이후로도 많았다. 그때마다 반사적으로
마법의 주문을 외웠다. “기죽지 말자. 그래서 뭐?”
그날도 새벽 4시 녹즙을 만들기 위해, 나는 다시 알람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