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환자 되기는 참 쉽더군.
인간의 두려움은 불확실성에서 비롯된다. 차라리 이것이건 저것이건 결정이 나는 거보다 불확실한 상태의 지속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내게 지난 3월 한 달은 유난히 길었다. 한 달 동안 몸무게가 2Kg 빠졌고 모든 일상생활에서 그 어떤 계획도 세울 수 없었다. 모든 게 미궁 속에서 어른 거리는 것만 같았다.
정기 검진을 받던 이비인후과에서 목 주위의 작은 멍울 세침 검사를 했다. 작년에도 같은 일이 있었는데 별 이상 없는 것으로 나와서 이번에도 크게 걱정은 없이 기다렸는데 다시 병원에 나와보라는 연락이 왔다. 림프암으로 의심되는 소견이 조직 검사에서 나왔다며 이번에는 좀 더 확실하게 중심부바늘생검(CNB)을 해보자 했다. 불안한 며칠 후 같은 소견이 나왔다.
급히 예약 가능한 병원을 찾았으나 불안한 내 맘과 달리 의료대란 영향인지 외래 예약도 대기 기간이 너무 길었다. 일단 가장 빠른 곳으로 예약을 하고 기다리는 동안 3월 초에 예정된 여행이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떠나는 작은 가족여행. 만약 림프암이 맞다면 타입에 따라서는 급하게 진행되는 경우도 있을 것인데, 이미 의심이 되는 상황에서 잠시지만 이 나라를 벗어난다는 게 안전한 것인지 혹 민폐를 끼치게 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이 복잡했다.
망설이다가 대학병원 종양내과의로 있는 지인에게 전화를 해서 상의하니 "여행 다녀와도 별 일이야 있겠느냐. 그냥 맘 편히 다녀오라."는 거였다. 아무리 암을 평생 공부하고 환자를 치료해도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니면 세부적인 것에서 도움이 되는 것은 없다. 단지 내가 치료받을 의사의 내부 평판 정도를 알아봐 주는 게 전부일 수도 있다.
3박 4일의 단기 여행이었고 특별한 전조 증상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무탈하니 다녀와서 대학병원 검진 절차에 들어갔다. 다시 초음파, CNB, 혈액 검사, CT, PET- CT.... 다행히 골수 검사까지는 필요 없다 해서 생략. 혈액 유전자 검사까지 마친 상황에서 나온 결과를 들으러 3월 31일 외래에 갔다.
체중 변화도 없고 야간 발한이나 지속적 고열등의 의심 증상이 전혀 없다는 이야기에 처음에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교수님의 말씀, "악성 림프종으로 진단됩니다. 타입은 T세포 유래 /미만성 거대 B세포 림프종(DLBCL)으로 완치율은 60%입니다. "순간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어휴~ 귀찮아"였다. 앞으로 전개될 치료 과정과 그에 따른 여러 가지 복잡한 일들이 나를 압도했다. 단 1초 만에 한마디의 말로 난 암 환자가 되었다. 일상의 평온함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이 검사결과가 정확한지, 다른 병원이라면 다른 결과가 나올 가능성은 없는지 궁금했다. 교수님은 치료에는 담당의와의 신뢰 관계가 중요하니 미심쩍어 다른 병원에서 진료를 받는 것을 원한다면 검사 자료를 주겠다며 소견서를 써주었다. 치료를 받다가 병원을 옮기는 환자도 있으니 처음 결정을 잘하라는 말이었다. 1주일 정도의 여유는 있으니 잘 생각해 결정하라는 이야기까지 한다. '그럼 1주일 넘으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인가? 그리 급하게 내 몸 안의 암세포가 자란다고?'
서울 큰 병원은 외래 예약 잡기도 어려운데 검사 기록을 다 가져간다 해도 쉽게 다른 곳에서 다시 결과를 듣는다는 것도 여의치 않은 일이다. 그리고 만약 다른 결과가 나온다면 그 판단을 위해 또 다른 병원을 찾아야 할 건데 그사이 지체되는 시간은 어떡할 것인가. 처음 이비인후과에서 검사 의뢰했던 곳에서도 같은 판단을 하였다 하니 그냥 이 결과를 믿고 치료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한데 이 림프종은 정해진 표준 치료를 따르는 걸로 아는데 어차피 표준 치료를 할 거라면 생각해봐야 할 게 있었다. 지방에 사는 내가 서울까지 오가기도 번거롭고 또 만약의 경우 응급사태가 났을 때를 대비해 내가 사는 지방의 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 어떠하냐는 물음에 담당 교수님으로부터 "같은 재료라도 쓰기에 따라 길거리 음식이 될 수도 있고 고급 요리가 될 수도 있다."는 답을 들었다.
소견서를 들고 진료실 밖을 나와 잠시 망설였다. 그래도 림프종 센터가 있으니 더 많은 케이스를 치료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고 음식에 대한 비유는 나름 치료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던 차에 함께 간 딸이 "엄마 그냥 여기서 치료받으면 어때?"라는 조심스러운 한마디에 선 듯 이곳에서 치료받기로 결정했다.
교수님은 바로 입원도 가능하다고 서둘러주었으나 일단 집에 내려가서 입원 준비도 해 와야 해서 3일 후 입원해서 항암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라는 생각이니 어차피 될 대로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