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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XA 매거진 Dec 06. 2019

사랑은 행복이 아니다.

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1967년 영화〈졸업〉의 결말은 이렇다. 주인공 '벤자민(더스틴 호프만 扮)'은 자신이 '일레인(캐서린 로스 扮)'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일레인의 어머니 '로빈슨 부인(앤 밴크로프트 扮)'의 방해 때문에 일레인은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된다. 그녀의 결혼 소식을 들은 벤자민은 식을 올리고 있는 교회로 달려가 소란을 피운다. 마지막 순간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벤자민과 일레인은 서로의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서 도망친다.


그러나 〈졸업〉의 진가는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모든 방해를 물리치고 가장 짜릿한 행복을 느껴야 할 그 순간, 벤자민과 일레인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어 간다. 허탈과 무기력, 어쩌면 경악. 마치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기라도 한 것처럼. 앞선 1시간 47분의 러닝타임을 비웃기라도 하듯, 영화는 〈졸업〉이라는 제목에 가장 적합하고도 가장 잔인한 결말로 우리를 몰고 간다. 사이먼 앤 가펑클이 노래한 'Scarborough Fair'의 서정적이면서도 쓸쓸한 멜로디와 함께.


Film 〈The Graduate〉 in 1967


만약 당신이 이들의 표정에서 어떤 덧없음이나 무상함의 감정을 발견했다면, 어떤 소설 하나를 떠올리기란 어렵지 않은 일일 것이다. 바로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사강은 소설의 제목을 물음표가 아닌 말줄임표로 끝내야 한다고 강조한 적 있다.)말이다.


'폴'은 39세의 인테리어 디자이너다. 그녀는 동년배 사업가인 '로제'와 오랜 연인 관계다. 그러나 폴은 로제와의 관계에서 권태를 느낀다. 언제나 똑같은 대화, 똑같은 식사, 똑같은 섹스. 똑같은 질문을 무신경하게 되풀이하는 로제를 보며 폴이 느끼는 감정은 행복과는 거리가 먼 무언가다.


Françoise Sagan(1935~2004)


이처럼 무미건조한 폴의 일상에 '시몽'이 등장하면서부터 파문이 일어난다. 시몽은 25살의 수습 변호사다. 주변의 이목을 끌만큼 수려한 용모의 이 젊은 청년은 폴에게 한눈에 반한다. 폴은 시몽의 순수하면서도 열정적인 애정공세에 당황하기도 하지만, 이내 그와 사랑을 나눈다. 로제와는 다른 방식으로 열렬하게 사랑을 속삭이는 시몽으로부터 폴은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열정을 떠올린다.


그러나 폴은 결국 로제에게 돌아간다. 이유는 없다. 폴은 스스로도 자신이 왜 그런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차라리 숙명이고 운명이다. 폴에게, 어디까지나 '그'로 남는 시몽과 달리 로제는 여전히 '우리'였다. 그녀는 여전히 로제를 사랑했다. 그것이 '열정적인 행복'의 동의어가 아니라 할지라도.


Film 〈Aimez-vous Brahms...〉 in 1961


중요한 것은 이유가 아니라, 폴이 로제를 선택했다는 사실 그 자체다. 폴은 이렇게 말한다.


그녀는 좀 더 울고 싶기도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싶기도 했다.
익숙한 그의 체취와 담배 냄새를 들이마시자 구원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울러 길을 잃은 기분도.


폴은 로제를 선택했다. 그녀 스스로가 말하듯, 이는 로제가 시몽보다 더 잘생겼다거나, 더 매력적이라거나, 더욱 열정적으로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 아니다. 그 모든 결함과 권태에도 불구하고, 폴은 로제를 사랑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로맨스는 독특한 세련미를 획득한다. 사강은 사랑과 행복은 다르다고 말한다. 'happily ever after', 사랑의 성취가 곧 행복이라 말하는 사회적인 마취를 사강은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행복이라는 작가의 통찰은 최근의 비혼·비연애주의와도 맞닿아 있다


〈졸업〉과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결말은 다르면서도 비슷하게 보인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도적으로 동일시해 왔던 사랑과 행복 사이의 간극을, 두 작품은 섬세하고도 냉정하게 파고든다. 그리고 우리 앞에 끄집어낸다. 우리가 외면해왔던 불편한 진실을. 현실은 동화처럼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날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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