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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XA 매거진 Apr 17. 2020

『페스트』가 SF 소설이라고?

알베르 카뮈의 바이오해저드 SF

Je me révolte, donc nous sommes.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


─Albert Camus,『L'Homme révolté』





이 시국에 읽는 『페스트』


전염병이 퍼져 도시가 봉쇄되고 사람들이 격리된다는 내용의 소설이 있습니다. 올해 나온 소설이냐고요? 아니요. 70년도 더 전인 1947년에 발표된 소설입니다. 바로 『페스트』입니다. 『이방인』과 『시지프 신화』를 써낸 알베르 카뮈의 장편소설이죠. 알제리의 조용한 해변 도시 '오랑'에 페스트가 퍼진다는 내용의 이 고전은 올해 코로나 바이러스의 세계적 범유행과 맞물려 최근 각 서점의 베스트셀러 차트를 역주행하고 있습니다. 


Albert Camus (1913~1960)


그러나 이 열렬한 관심이 무색하게도, 『페스트』를 읽는 우리 사회의 시각은 과거와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단지 전염병이라는 소재에 관해 몇 마디를 더 얹을 뿐, 결국은 '거대한 부조리(L'absurde)에 투쟁하는 인간의 실존적 결단'이라는 기존의 독법을 되풀이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독해가 틀렸다고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아주 정확한 독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다만 좀, 재미가 없을 뿐이죠.


2020년에는 2020년에 걸맞은 독해가 필요합니다. 다른 누군가가 아닌, 지금 여기의 우리 자신과 즐겁게 공명할 수 있는 독법이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하려 합니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는 SF소설이다!"라고요.






『페스트』 : 바이오-해저드-SF


4월 16일 아침, 의사 베르나르 리유는 자기의 진찰실을 나서다가 층계참 한복판에서 죽어있는 쥐 한 마리를 목격했다.


『페스트』는 바로 이렇게 시작합니다. 죽은 쥐 한 마리를 목격한 의사 '리유'는 처음엔 별생각 없이 그곳을 지나칩니다. 그러다 문득 위화감을 느끼곤 수위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그러나 수위는 누군가의 못된 장난일 것이라며 일축할 뿐입니다. 리유는 수위의 미적지근한 반응을 탐탁지 않게 여기다가도, 이내 대수로운 일은 아니라며 넘어갑니다. 그러나 사태는 점점 심각한 방향으로 번져나갑니다.



출처 - National Geographic
그러나 그 후 며칠이 지나자 사태는 점점 더 심각해졌다. 죽은 쥐들의 수는 날로 늘어만 갔고 그 수집의 양은 매일 아침 더욱 많아졌다. 나흘째 되는 날부터 쥐들은 떼를 지어서 거리에 나와 죽었다.


이제 사람들은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주택, 회사, 공공기관, 심지어는 길바닥까지 가리지 않고 도시 곳곳에서 죽은 쥐들이 발견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 숫자 역시 하루가 다르게 불어나, 시청에서는 하루에 8000여 마리의 쥐를 수거하기에 이릅니다. 사람들은 불안에 떨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기이한 현상은 어느 날 돌연 마무리됩니다. 쥐들이 갑자기 모습을 감춘 것입니다. 사람들은 안도했습니다. 그것이 또 다른, 그것도 더욱 경악스러운 재앙의 시작인지도 모른 채…….



Film 〈La Peste〉in (1992)
그런데 바로 그날 정오에 의사 리유가 자기 집 건물 앞에서 차를 세우는데, 길 저쪽 끝에서 수위가 고개를 푹 숙인 채 팔다리를 뻗쳐 벌리고 허수아비처럼 어색한 자세로 힘겨워하며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 수위의 눈이 번뜩거렸고 숨소리가 거칠었다. 도무지 몸이 가뿐하지가 않아서 바람을 쐬러 나왔다는 것이었다.


쥐들이 사라진 바로 그날, 별일 아니라며 웃어넘긴 바로 그 수위가 앓아눕습니다. 처음엔 단순한 통증뿐이었지만, 이내 고열이 끓고 목의 멍울과 사지가 부어오르더니 담즙을 게워내기까지 합니다. 리유는 그를 입원시키기 위해 구급차를 불렀으나, 결국 수위는 이송 중 사망하고 맙니다. "쥐들!"이라는 단말마의 외침만 남겨놓은 채로요. 그리고 그의 죽음이 도화선이라도 된 듯, 머지않아 오랑 전역으로 페스트가 퍼져나가기 시작합니다.


여기까지가 『페스트』의 도입부입니다.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들지 않나요? 그래요, 『페스트』의 도입부는 좀비를 소재로 한 작품들의 도입부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합니다. 이상한 증세를 보이며 죽어가는 동물들, 전문직 종사자인 주인공, 답답할 정도로 미온적인 당국의 대처, 심지어는 별일 아니라며 떵떵거린 조연이 감염되면서 서사가 심각한 국면으로 접어드는 것까지요! 여기서 우리는 아주 익숙한 서스펜스를 느낄 수 있습니다.


〈28 Days Later〉, 〈World War Z〉, 〈The Last of Us〉


그뿐인가요. 소설이 전개되는 양상에서도 좀비 영화와의 유사점은 발견됩니다. 감염이 발생한 도시가 차단되고, 사회는 혼란에 빠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수용소에 격리되고, 어떤 사람들은 밀수로 한탕을 챙깁니다. 또 어떤 사람은 경비병을 매수해 탈출하려 하고, 어떤 사람들은 페스트에 맞서 의료봉사대를 꾸립니다. 모두 좀비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클리셰죠. 주인공이나 특수부대의 스릴 넘치는 총기 액션은 없지만, 이 정도면 최신 좀비 소설이라고 해도 손색없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저는 『페스트』가 SF 소설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생물학적 재난을 다룬 바이오해저드(Biohazard) SF 소설이라고요. 단지 전염병이라는 소재를 채택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페스트』는 소재뿐만 아니라 클리셰를 활용한 서사의 전개와 그로부터 발생하는 서스펜스와 스릴에 이르기까지 바이오해저드 SF라는 장르의 특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겠죠. "그렇다면 『페스트』가 바이오해저드 SF의 원조격인 건가요?" 굉장히 그럴듯한 지적이지만, 그렇지 않다고 답하려 합니다. 저는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바이오해저드 SF라는 장르의 연장선상에 『페스트』가 놓여야 한다고요.






새로 읽는 것은 새로 쓰는 것이다


정확히 짚고 넘어갑시다. 저는 『페스트』로 인해 바이오해저드 SF가 태동했다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간의 바이오해저드 SF로 인해 『페스트』가 탄생했다"는 본말 전도된 선언이 이 문단의 골자입니다. 이상하게 들리죠. 저도 압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그간 『페스트』를 어떻게 읽어 왔나요? '전후 문학', '부조리 문학', '실존주의 사상' 등, 카뮈 하면 으레 따라붙는 수식어에 이끌려, 오랑에 퍼진 페스트를 세계 2차 대전이나 죽음의 은유로만 이해해 오지 않았나요? 그에 맞서는 리유와 타루의 투쟁, 그리고 파늘루 신부의 설교나 랑베르의 고뇌로부터 의미 있는 주제의식을 찾아내기 위해 애쓰지 않았나요? 마치 시험을 치르듯 말입니다. 다른 똑똑한 누군가가 이미 밝혀 놓은 해석을 확인하려는 것처럼, 나도 그러한 해석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교양 있다는 걸 증명하려는 것처럼요.


그것이 즐겁던가요? 아니요. 지루하고 고되죠. 뿐만 아니라 불안하죠. '내가 제대로 읽은 게 맞나?', '아,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작품에 담겨 있(다고 여겨지)는 주제와 의미를 찾아내려는 독서는 그래서 노잼입니다. 그러면 지속되기도 어렵죠. 이러한 독서를 견지한다면, 페스트가 SF라는 주장도 성립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Jean-Paul Sartre (1905~1980)


읽는다는 것은 그렇게 일방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사르트르의 말마따나, 읽는 행위는 곧 쓰는 행위입니다. 작품에 미리 담겨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거기서 건져내야 할 것도 없습니다. 있는 건 오직 흰 종이와 검은 활자뿐입니다. 읽는다는 것은 그러한 물리적인 활자를 씨실 삼아, 그리고 우리의 사상과 의식을 날실 삼아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나만의 패브릭 포스터를 짜는 일과 같습니다. 그것은 나와 활자의 사이를 오가며, 매 순간마다 새로운 결의 의미를 창조하는 작업입니다.


요컨대 읽기는 책과 나의 상호작용인 셈입니다. 그 말은 책이 나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내가 책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가 활자 자체를 지우고 고쳐 쓸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의 패브릭 포스터를 다른 이에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친애하는 누군가에게 선물할 수도 있고, 선물 받을 수도 있죠. 우리가 선물한 패브릭 포스터는 선물 받은 이의 일부로 남을 것입니다. 반대로 다른 이에게 선물 받은 패브릭 포스터는 우리 자신의 일부로 남을 것이고요. 그러한 연쇄가 이어질 때, 오가는 선물 속에서 "이 책이 어떤 책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끊임없이 변모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저는 그동안 SF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여러 패브릭 포스터를 선물 받았습니다. 그 감사한 선물들을 이용해서, 저는 오늘 『페스트』를 바이오해저드 SF라고 주장하는 패브릭 포스터를 짜냈습니다. "그간의 바이오해저드 SF를 통해 『페스트』가 탄생했다"라는 엉뚱한 선언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Film 〈La Peste〉 in 1992


이처럼 2020년에 『페스트』를 새로 읽는다는 것은, 『페스트』와 함께 2020년 지금 여기의 우리가 하고 있는 바로 그 생각을 엮고 엮어 패브릭 포스터를 짜는 일과 같습니다. 또 그것을 주고받는 일, 그리하여 또 새로운 패브릭 포스터를 짜는 일이기도 하고요. 이것이 고전을 새롭게 써내는 일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이 글을 빌어, 제가 만든 패브릭 포스터를 다시 여러분에게 선물하려 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일부가 되어서, 다시 또 다른 패브릭 포스터의 일부가 될 것이라 상상해 봅니다. 그렇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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