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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XA 매거진 May 01. 2020

당신의 일상을 여행하기

《천재 유교수의 생활》과 함께

코로나 바이러스 유행으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기약 없이 연장되고 있습니다. 답답하지만 어쩔 수 없지요. 바이러스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고, 우리가 방심한 틈을 타 다시 한번 지역사회로 번져 나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직은 우리 모두 불필요한 외출을 자제하고, 사람들과의 대면을 줄여야 합니다. 모처럼 찾아온 황금 같은 연휴라고 하더라도요.




그래도 씁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속절없이 흘러가버리는 휴일이 아깝기도 하고, 저녁마다 아무 일도 없이 잠드는 게 허전하기도 합니다. 다소 무기력이나 우울감을 느끼기도 하고요. 집에 틀어박힌 채로 유튜브나 TV만 들여다보는 건 싫은데, 그렇다고 평소처럼 친구들을 만나거나 재밌는 체험을 하러 나갈 수도 없으니 답답하죠. 도대체 이 무료하고 암담한 시기를 어떻게 보내야 한단 말인가요?


그런 우리에게, 저는 권해보려 합니다. 우리의 일상을 여행해 보자고요.





이 책은 도로교통법을 준수하고
자유경제법칙에 충실한 학자의
밝고 명랑한 기록이다.



볼거리와 먹을거리로 가득한 관광지도 아니고, 드넓은 자연이 펼쳐진 휴양지도 아니고,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지겹도록 마주하는 일상을 여행하라니. 어불성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상을 어떻게 여행할 수 있을까요? 일상을 여행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다행히 우리에겐 이 뜬구름 잡는 듯한 질문에 힌트를 줄 만한 만화가 있습니다. 바로 《천재 유교수의 생활》입니다.


《천재 유교수의 생활》



'유택(柳沢, 柳澤)'은 작중 Y대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는 교수입니다. 그는 평범한 듯하면서도 아주 독특한 생활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 밤 10시에 잠에 들고, 도로에선 아주 반듯한 우측통행을 하며, 철저하게 근검절약을 지킬 뿐만 아니라 조금이라도 궁금한 것이 있으면 지나치지 않고 물어봅니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별로 특이할 것 없고, 오히려 아주 모범적인 생활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60여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이를 지켜왔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죠.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경제법칙처럼, 유 교수는 호기심과 탐구로 가득 찬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 미처 의문을 품지 않은 것에 하나하나 질문을 던져 가면서요.


"왜 이 아이가 때렸을까? 이유가 있을 것 아니냐."
"나도 몰라요!"
"모르면 이 아이한테 물어보너라."
"싫어!"
"왜 싫지?"
"그 …, 그건……."
"그에 대해서 잘 생각하지 않으면 사물을 탐구할 수가 없어."


《천재 유교수의 생활》5권 제49화, 〈손녀딸과 할아버지〉중


손녀인 하나코를 유치원에서 데려오던 중, 유 교수는 한 가지 소동을 맞이합니다. 하나코의 동급생이 가게 앞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쉬던 하나코를 때린 것입니다. 난데없이 맞아서 아픈 데다 아이스크림을 떨어뜨리기까지 해 화가 난 하나코는 그 동급생을 똑같이 때려 줍니다. 결국 동급생은 엉엉 울음을 터뜨리고, 하나코는 의기양양하게 승리감을 만끽합니다.


그러나 유 교수는 손녀인 하나코가 아니라 울고 있는 동급생을 달래 줍니다. 할아버지를 무척 좋아하는 하나코는 심통이 나 "걔가 먼저 때렸어요!"라며 억울해합니다. 저 애가 아니라 나를 달래 달라는 것처럼요. 하지만 유 교수는 전혀 뚱딴지같은 반응입니다. "왜 이 아이가 때렸을까?"라면서요.



그제야 하나코는 동급생의 유치원 가방 장식이 바뀌어 있다는 것을 눈치챕니다. 분명 며칠 전만 해도 돼지 캐릭터였는데, 지금은 꽃 모양 장식으로 바뀌어 있었거든요. 이에 하나코는 동급생에게 왜 가방 장식을 바꾸었냐고 물어봅니다. 하지만 동급생은 무언가 토라진 채 그냥 바뀌었을 뿐이라고만 말합니다. 실은, 그 아이가 가방 장식을 바꾼 것은 작은 오해 때문이었습니다. 며칠 전 하나코가 그 아이의 가방 장식을 보고 웃었거든요. 물론 하나코는 그게 마음에 들고 귀여워서 웃은 것이었지만요. 아이들은 종종 커뮤니케이션에 서툰 법입니다.


여전히 심통이 난 동급생에게, 하나코는 바꾸기 전의 돼지 장식도 예뻤다며, 꽃을 단 돼지는 어떻겠냐고 묻습니다. 이 한 마디에 하나코와 동급생의 갈등은 원만히 풀리게 됩니다. 오해의 전말을 확실하게 따져 밝힌 것은 아니라곤 하지만, 가끔은 이런 한 마디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죠. 이를 보며 유 교수는 '내 흉내를 내지 않아도, 하나코는 나름대로의 해결 방법을 알고 있다'라며 기특해합니다.


드라마 〈天才柳沢教授の生活〉, 마츠모토 하쿠오 주연


하나코가 동급생과 화해할 수 있었던 계기는 관찰이었습니다. 가방 장식이 돼지 모양에서 꽃 모양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관찰을 통해 포착해낸 것이죠. 세심한 관찰은 우리가 그간 알아채지 못했던 점을 발견하게 해 주고, 이는 곧 대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감정을 갖게 해 줍니다.


할아버지처럼 되고 싶으면 나를 보기 전에 주위를 둘러보거라. 연구할 만한 재료들이 많이 있잖아. 경제학이란 그런 학문이란다. 자본주의가 좋다는 사람들, 사회주의가 좋다는 사람들, 이 지구 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단다. 개인적인 주관과 편견을 버리고 우선은 이해부터 하는 거야. 무슨 일이든 우선 '왜 그럴까?'라는 의문과 그에 대한 탐구가 중요하단다.


하나코에게 이런 관찰로의 길을 열어준 것은 "왜?"라는 질문이었습니다. 하나코는 할아버지인 유 교수의 질문을 따라, 동급생이 나를 때렸다는 사실에 분개하는 감정을 잠시 멈추고 차분하게 상황을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나를 감싸고 있는 감정의 결을 잠시 밀어놓는 것. 그것이 관찰을 향한 첫걸음입니다.


여행이 즐거운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먼 나라의 여행지에선, 단지 그곳에 두 발을 디디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평소 우리를 옥죄던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거든요. 바로 이것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여행지의 골목골목들이 기억에 생생히 남아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감정이 자연스레 멀어지면, 관찰도 자연스레 이루어지니까요. 일상을 여행하는 것 역시 이와 똑같습니다. 일상에 의문을 갖고, 관찰하고, 무언가를 느끼는 것. 지리적인 장소만 다를 뿐이죠.


제 창밖으로는 이런 게 보이는군요


물론 이는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일상을 지내며 느껴지는 감정을 잠시 옆으로 밀어놓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 감정들은 너무 익숙한 것이니까요. 일상을 여행처럼 여기기 어려운 이유는 일상이 우리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미 너무 많은 감흥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관성에 이끌리듯 감응하고 있습니다.


그런 익숙함에서 의식적으로 빠져나오는 일은 참 고난합니다. 서툴고 힘들죠. 가끔은 하나코처럼 열받기도 하고요. 그러나 그 성공으로부터 느끼는 새로운 감정은, 그 어떤 여행지에도 얻을 수 없는 특별하고 사소한 감정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사회적 거리두기가 끝나길 기약 없이 기다리는 것보다, 눈을 조금 돌려 우리의 일상을 차근차근 들여다보는 건 어떨까요. 당장 커피 한 잔을 들고 창 밖을 보세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또 하나의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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