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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XA 매거진 May 15. 2020

밀란 쿤데라 - 무의미의 축제

무의미의 세대, 무민 세대




무민(無mean)세대, 나의 세대가 받은 이름이다. 하얗고 폭신하게 생긴 동명의 캐릭터가 떠오르는 이름이다. 파찰음 같이 아픈 발음이 없는 부드러운 이름이다. 솜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이다. 하얗고 푹신하고 따듯한 느낌이다. 최악의 기록을 나날이 갱신하고 있는 세대에 붙기에 조금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장에서 오래 묵어 더 무거워진 솜이불을 낑낑대며 꺼내다가 깨달았다. 먼지가 많은 솜. 태양이 가장 높을 때에 자라는 솜. 아주 헐한 가격이 붙는 솜. 나는 솜의 세대구나.     




배꼽과 거짓말 

    


이 세대의 에로티시즘이란 배꼽이다. “허벅지, 가슴, 엉덩이는 여자들마다 다 형태가 달라. 그러니까 (중략) 한 여자의 개별성을 나타내 준다고.” 개별성이자 여성성의 상징으로 남자들에게 매력을 불러일으킨 여성의 신체들에는 각기 의미가 있다. 사랑을 개별적인 의미의 연회로 만들었던 에로티시즘. 배꼽은 단지 배에 팬 의미가 없는 구멍이다. “배꼽을 가지고 이 여자가 내가 사랑하는 여자라고 말할 수는 없어. 배꼽은 다 똑같거든 그러면 배꼽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에로틱한 메시지는 뭘까?” 배꼽에서 개별성과 의미를 찾을 수 없다. 어느 누구에게나 배꼽이 있다. 배꼽은 먼지를 모아 가진다. 배꼽은 여성에게만 있지 않다. “최초의 탯줄은 바로 그녀의 음부, 배꼽 없는 여자의 음부에서 나온 거야. 성경에 나온 말대로라면 거기서 다른 줄들도 나왔어, 줄 끄트머리마다 작은 남자나 여자를 매달고서.” 배꼽 없는 여자로부터 시작된 배꼽의 연속과 보편. “천사에게 성이 없다면 여자 배에서 태어나지 않은 거잖아.” “그러니까 배꼽이 없어.” 무민의 동그랗고 하얀 배에는 배꼽이 그려지지 않는다. 무민은 천사인가? 무민의 에로티시즘이 배꼽이라면 가지지 못한, 불가능한 상황에 대한 동경으로부터 나온 것일까.

“탄생과 죽음을 동시에 기념하는 이중 축하 파티”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상상의 암이 그를 즐겁게 했다. 그는 길을 가며 계속 웃었다. 그는 웃었고, 좋은 기분을 만끽했다.” 다르델로의 거짓말에는 이득도 손해도 없다. 다른 이들의 눈으로도 자신의 눈으로도 의미를 찾거나 설명해 낼 수 없는 거짓으로. “그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볼펜으로 종이에 나선을 죽죽 그어본 일이 있다. 손 여러 군데에 잉크가 번져서 묻었고 잉크가 뭉친 볼펜 똥이 종이를 찢었다. 낙서를 해석하려는 일은 범죄의 그림자. 낙서가 범죄의 예비라면 웃음을 참을 수 있을 텐데. 어떠한 일의 예비도 아님이 웃음을 참지 못하게 한다. 무민이 이를 드러내며 웃는 그림을 본 일이 있는가. 입꼬리를 보이지 않게 감춰두는 일에 익숙해지자.     



칼리닌의 투쟁     


“아무 죄 없는 가여운 꼭두각시, 그러면서도 오랫동안 소비에트 연방 최고회의 의장,” 전립선 비대증으로 강렬한 소변욕구에 시도 때도 없는 투쟁을 해야 했던 사람. 규율에 절대 복종하기 위해서 스탈린의 말이 이어지는 도중에 화장실에 갈 수 없었던 사람. 투쟁의 패배로 노란 깃발을 거는 일. 투쟁하는 사람의 표정을 지그시 바라보며 문장을 기워 늘리다가 깃발이 드디어 올라오면 바느질을 마감하는 스탈린. “팬티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괴로움을 견딘다는 것…생기고, 늘어나고, 밀고 나아가고, 위협하고, 공격하고, 죽이는 소변과 맞서 투쟁한다는 것…이보다 더 비속하고 더 인간적인 영웅적 행위가 존재하겠냐?” 스탈린은 충성스런 칼리닌의 고통을 바라보며 감동을 느꼈다는 증거를 남긴다. 쾨니히스베르크, 칸트의 도시를 칼리닌의 이름을 붙여 칼리닌그라드라 부른다. “우리 거리들에 이름을 장식한 이른바 그 위인 이라는 자들은 관심 없어. 그 사람들은 야망, 허영, 거짓말, 잔혹성 덕분에 유명해진 거야. 칼리닌은 모든 인간이 경험한 고통을 기념하여, 자기 자신 외에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은 필사적인 투쟁을 기념하여 오래 기억될 유일한 이름이지.” 자신 이외에 아무도 희생하지 않는 대의. 문명화된 인간으로 존엄을 지키기 위한, 팬티의 순결성을 지키기 위한 투쟁을 기념하자. 매일 계속되는 생활의 투사에게, 단칸의 칼리닌그라드를 세워주자. 5만원 창문 값을 아끼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만 했던 세대에게. 


    

관객 없는 배우     



“그의 삶의 의미인 직업은 배우였다.” 칼리방은 극단에서 써주지 않는 일 없는 배우다. 칵테일파티 서빙으로 돈을 벌지만 그 일도 자신의 소명을 다시 찾는 일로 만든다. “자신이 프랑스인이 아니라 외국인이며, 주위의 아무도 모르는 언어 딱 하나밖에 할 줄 모르는 걸로 하겠다고 우긴 것은 그 때문이었다.” 예술가를 자신의 소명으로 삼는 사람다운 집착이 칼리방에게는 있다. 그래서 그는 아무도 모르는 가상의 언어를 만들어내는 일에 집착한다. “특별한 음성학을 창제해야 하고, ‘아’나 ‘오’를 프랑스 사람들처럼 발음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음절에 일정하게 강세가 주어지는지도 정해야 한다.” 칼리방의 주절거림은 배후에 문법 체계를 갖추고, 배경을 갖추어가며 새 언어가 되었다. 삶의 의미에 매혹되어 만들어낸 정교한 장치는 곧 칼리방에게 “기를 쓰는 그런 짓이 모두 아무 소용없는 일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칵테일파티에 온 손님들이 그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관객 없는 배우가 되었다.” 연기를 봐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배우가 연기에 흥미를 잃는 일은 자연스러운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하는 사람은 결국 그 일에 흥미를 잃는 일이 자연스러운가. 무민이 흥미를 잃는 때는 언제인가. 나의 세대가 맞을 결과는 무엇인가.   


   

무민의 축제     



“우리 앞에, 무의미는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절대적으로 무구하게, 절대적으로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어요.” 솜 베개를 뜯어본 일이 있다. 퀴퀴한 냄새를 머금은 솜은 숨이 잔뜩 죽어서 눌려져 있었다.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솜은 그래도 참 하얀색이었고, 날려보면 꽃잎이나 낙엽처럼 춤을 출 줄 알았다. “다르델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무의미를 들이마셔 봐요.” 나의 세대는 춤을 출 줄 알았다. 무의미의 축제에 손님으로 초대받을 수 있을 만큼 꽤 잘 추었다. 곰팡이 핀 세대는 아직 하얀색인가. 헐값에 팔려나가는 세대는 하얀색인가. 무민의 축제는 하얀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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