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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XA 매거진 Mar 13. 2019

『인간실격』은 사랑의 기록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다자이 오사무의 인생은 짧았다. 1909년에 태어나 1948년에 죽었다.

만 40세가 채 되기 전에 그는 다섯 번 자살을 시도했다. 그 중 네 번은 실패하고 한 번은 성공했다.





『인간실격』을 '평범'하게 읽어보자


   『인간실격』에는 무시무시한 수식어들이 따라붙습니다. '일본 데카당스 문학의 선봉', '자기 파괴의 문학', '죄의식과 불신, 자기혐오'. 그럴 만도 합니다. 우울하잖아요. 처음 소설을 읽을 땐 이렇게도 생각했습니다. '순 자살하려는 얘기밖에 없는 게 무슨 세계명작이야?' 작가인 다자이 오사무의 자살 이력까지 겹쳐 보게 되면 의심은 확신으로 변합니다. 주인공 '오바 요조'의 목적은 자살이다, 라고요.


   그런데 말입니다. 요조가 자살을 원하지 않았다는 추측은 어떨까요? 정확히 말하자면, 자살은 '요조가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최후의 수단'이라는 추측입니다. 다른 많은 이들에게 그렇듯 자살은 마지노선입니다. 모든 것이 통하지 않을 때 그래, 더 이상은, 하고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선택하는 것이 자살입니다.


 실제로 소설에서 요조는 생활인으로서의 면모도 보입니다. 결혼도 하고, 일도 합니다. 죽음이 요조의 목적이라면 필요 없는 일입니다. 요시코와 결혼하며 요조는 (단 한번이지만)"행복하다"고까지 말합니다. 요조는, 어쩌면 다른 이들처럼 "차차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요조도 행복하게 살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요?



동전의 양면같은 열망과 공포


 요조가 남들과 다른 인생을 살게 된 이유는 공포였습니다.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공포, 언젠가 그런 속내를 들켜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 요조는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무슨 선물을 받고 싶냐는 질문을 듣지만 제대로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날 밤 요조는 아버지를 만족시키지 못했다며, 아버지의 복수를 두려워하는 등 다소 편집증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어린 요조는 가족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익살을 연마합니다. 익살스러운 말과 행동으로 집안의 가족들과 고용인들을 웃기고, 학교의 교사와 친구들을 웃깁니다. 익살은 요조의 보호색이었습니다.

뭐든 상관없으니까 웃게만 만들면 된다. 그러면 인간들은 그들이 말하는 소위 '삶'이라는 것 밖에 내가 있어도 그다지 신경쓰지 않을지도 몰라. 어쨌든 인간들의 눈에 거슬려서는 안 돼. 나는 무(無)야. 바람이야. 텅 비었어.

요조의 이러한 독백은 다른 이들과 함께 살고 싶다는 강한 열망을 보여줍니다. 요조는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남들과 다른 사람'은 남들과 함께 살아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혼자서 살아갈 만큼 강인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요조는 버림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요조는 어떻게든 일반인 코스프레를 해냅니다. 평범한 아이처럼, 평범한 학생처럼 살아가기 위해 연기합니다.


 그러나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고 싶다는 열망이 커지면 커질수록, 남들과 다르다는 정체를 들켜 버리면 어떡하지, 라는 공포도 커지기 마련입니다. 익살스러운 모습을 연출하는 자신에게 "일부러 그랬지"라고 묻는 다케이치로부터 요조는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공포를 느낍니다. 이처럼 요조는 '남들에게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들과 함께 살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맞물려 있는 심리입니다.


오바 요조의 삶은 피에로 같았습니다.



사랑이라는 양날의 검


 공포에 질린 요조는 어쨌든 스물일곱의 나이까지 살아남습니다. 두려움에 몸서리치던 요조가 어떻게 27년이란 시간을 버틸 수 있었을까요.


 사실 27년의 세월은 요조 혼자서 버틴 것이 아닙니다. 요조를 지탱해 온 것은 타인이었습니다. 악마적 친우 호리키, 함께 동반 자살을 꾀한 쓰네코, 무한한 순수함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요시코 등 많은 이들이 요조를 지탱해 왔습니다. 그들과 함께할 때의 요조는, 행복해 보이진 않더라도 그런대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만화를 그려 돈을 벌기도 하고, 아이와 놀아주기도 합니다. 이 때 요조는 살아갈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조는 이들과 함께 자신의 삶을 살아갔던 것입니다.


 하지만, 타인이 요조를 살아가게 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타인이 요조를 죽일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잘 살펴보면, 요조는 아무때나 자살을 시도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그가 자살을 기도했던 것은 타인과의 관계가 어그려졌을 때입니다. 쓰네코가 함께 죽자고 했을 때, 요시코와의 결혼생활이 불행해졌을 때, 그리고 마침내 정신병원에 입원해서 사회로부터 격리되었을 때, 요조는 자살을 결심합니다.

 그러나 내가 얼마나 모두를 무서워하는지, 무서워하면 할수록 남들은 나를 좋아해 주고, 남들이 나를 좋아해 주면 좋아해 줄수록 나는 두려워지고 모두한테서 멀어져야만 하는, 이 불행한 제 기벽을 시게코한테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노릇이었습니다.
 "시게코는 하느님에게 무엇을 부탁하고 싶은데?"
 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화제를 바꿨습니다.
 "시게코는 말이야, 진짜 아빠가 갖고 싶어."
 화들짝 놀라고 아찔하게 현기증이 났습니다. 적(敵). 내가 시게코의 적인지, 시게코가 나의 적인지. 어쨌든 여기에도 나를 위협하는 끔찍한 인간이 있었구나. 타인. 불가사의한 타인. 비밀투성이 타인. 시게코의 얼굴이 갑자기 그렇게 보였습니다.

 요조의 존재 근거는 타인입니다. 그래서 요조는 타인과의 관계가 어긋나는 것을 무엇보다도 두려워합니다. 그가 얹혀사는 시즈코네 딸인 시게코는 요조와 즐겁게 놀면서도 그가 아닌 진짜 아빠를 원합니다. 자신이 시게코를 진정으로 기쁘게 해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 요조는 시게코의 아파트를 떠나버립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이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 요조는 삶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요조의 목적은 자살'이라는 첫인상은 여기서 깨집니다. 버림받기 싫다는 열망과 공포,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려는 모습, 관계가 어긋났을 때의 절망. 이걸 사랑이라고 부른다면 지나칠까요. 요조는 누구보다 인간을 사랑했다고,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버림 받은 채로는 살아갈 수 없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요. 요조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기엔, 우리도 조금은 그렇잖아요.


2019년 일본 개봉 예정인 영화 <인간실격> 스틸컷. 니나가와 미카 연출, 오구리 슌 주연.




   『인간실격』은 액자식 소설이다. 소설의 서술자는 두 명이다.  「첫 번째 수기」 ~ 「세 번째 수기」의 서술자 '오바 요조'와 「서문」과 「후기」의 서술자가 이들이다. 후자는 교바시의 마담으로부터 요조의 수기를 건네받아 세간에 내놓은 사람이다. 다자이 오사무는 왜 액자식 구성을 택했을까. 단순히 실제감을 부여하기 위한 수사적 표현일까?


   이 솔직한 수기엔 자신의 속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요조에게 이는 들켜서는 안 될 내용이다. 그러나 「서문」과 「후기」를 통해 소설은 '생판 모르는 남의 이야기'처럼 탈바꿈한다. 『인간실격』이 다분히 자전적인 내용을 담은 소설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를 통해 요조-다자이 오사무는 자신의 솔직한 이야기를 담으면서도 그것이 단지 허구에 불과함을 강조하려던 게 아닐까.


 그렇게 『인간실격』은 하나의 '익살'로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결국 다자이 오사무는 '도깨비식 화법으로 그린 음산한 자화상'을 우리에게 조금 보여준 것이다. 액자식 구성이라는 장치를 통해 독자들이 그것을 픽션이라고 믿게 한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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