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달리는 소녀>와 <우리들의 워 게임>이 사춘기를 이야기하는 방식
일본의 서브컬처에서 여름은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특별한 이벤트의 계절'로서의 여름이 그 중 하나다. 작열하는 태양, 바다, 바캉스, 야키소바, 로맨스! 다른 하나는 '무료하고 나른한 계절'로서의 여름이다. 불 꺼진 한낮의 거실, 덜덜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 저 멀리서 매미 우는 소리와 비행기 엔진음이 먹먹하게 들리는……. 무료하고 나른하고 끈적하고 지루하고 심심해 죽겠는데 무슨 일 안 일어나나 싶고. 휴가도 끝났고, 밖으로 놀러나가는 것도 덥고 싫증나고, 그냥 집에서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나 들으면서 아무 것도 안 하고 누워 있는 시간들. 딱 초등학생 때 여름방학 중반 즈음의 느낌이랄까.
호소다 마모루는 그런 분위기를 표현하는 데 능한 감독이다. 그래서인지 호소다 마모루가 감독한 영화(특히 초기작일수록)의 배경은 대부분 여름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주인공들은 여름용 교복을 입고 있고, <썸머 워즈>는 제목부터 대놓고 Summer다. 우연의 일치겠으나, 그가 총괄감독을 맡았던 <디지몬 어드벤처> 애니메이션의 21화(현실 세계로 돌아온 태일!) 역시 배경은 여름방학이고.
그런 여름의 어느 날, 무료한 일상을 뒤흔들어 놓을 비일상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호소다 감독의 영화는 그렇게 시작한다. 그러나 이 이변을 알아차리는 건 오직 주인공(어린이) 뿐이다. 다른 사람들(어른)은 아무 것도 눈치채지 못한다. 세계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돌아간다. 변화를 느끼는 사람도 있지만,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지만 실은 무시무시한 위협이 도사리고 있다.
정리하면 이렇다. 따분하고 무료한 여름이, 아이들만 알아차리게 된 비일상적인 사건(위협)에 의해 파괴될 뻔하다가 아이들의 고군분투 끝에 해결된다. 그리고 아이들은 무언가 조금 변화된 채 일상으로 복귀한다. 그래, 이건 성장물이다. 생명이 움트는 봄이 유년기, 성숙한 결실을 맺는 가을을 성년기에 비유함을 생각해본다면 '여름'이라는 배경설정은 다분히 상징적이다.
그렇다면 왜, 아이들만 죽어라 구르고 어른들은 무능한 걸까? 조금 더 자세히 살펴 보면, 어른들에겐 사건을 해결할 힘이 없는 것뿐만 아니라 사건 자체를 문제시하지조차 않는다. 즉, 이건 순전히 '아이들에게만 주어진 일'이다. 어른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성장, 이는 다시 말해 사춘기적 성장이다. 사춘기에 경험하는 자아의 확장, 심화 그런 것들은 누군가 대신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그걸 겪고 있는 사람 스스로가 오롯이 견뎌내야 하는 내면적인 투쟁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 투쟁에 어른들이 끼어들 틈은 없다.
<디지몬 어드벤처> 시리즈가 어린이들의 정신적인 성장을 보여줬다면, 디아블로몬은 그 대척점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선택받은 아이들은 몸은 별로 자라지 않았지만 정신은 성숙해진 데 반해, 디아블로몬은 몸만 자라고 정신은 자라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는 "나 잡아 봐라~!", "시계를 가진 건 누구게?"라며 어린애 같은 말투로 태일이와 매튜를 도발한다. 다시 말해 디아블로몬은 '아직도' 사춘기를 겪지 않은 존재, 정신적인 성숙을 유보한 채 1차원적인 욕구만을 좇으며 살아가는 존재다. 일종의 반면교사다.
주인공 일행이 이런 위협을 극복하는 방법은 '조그레스(합체진화)'다. 디아블로몬을 쓰러뜨리는 건 워그레이몬도 메탈가루몬도 아닌, 그 둘이 합체하여 진화한 오메가몬이다. 사이좋은 친구와 서로 힘을 합쳐 나아가기. 뿐만 아니라 해당 극장판의 오메가몬이 세계의 수많은 아이들이 응원의 메일을 통해 진화한 존재(희망체)임을 생각한다면, 사춘기를 헤쳐 나갈 결속의 네트워크는 더욱 두터워진 셈이다.
한편, 사이버공간 속으로 들어 온 태일과 매튜가 각각 파트너 디지몬들에게 '함께 싸우자'고 이야기하는 장면은 사춘기의 근본적인 특징을 상기시킨다. 친구와 함께 한다고 다가 아니다. 실제로 과도하게 보내 온 응원의 메일은 처음엔 주인공들을 방해하기까지 했다. 단순히 친구랑 으쌰으쌰한다고만 해서 사춘기를 잘 보낼 수는 없다. 나 자신을 돌아보는 것도 중요하다. 각각의 파트너 디지몬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조그레스는 불가능했으리라. 결국 나의 가장 오래되고 오래될 친구는 나 자신이니까.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 그리고 친구와 함께하는 것. 둘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둘 모두를 성취하는 것. 이것이 <우리들의 워 게임>이 사춘기를 극복하는 방식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 위협은 주인공인 마코토에 의해 자초된 것이다. 우연히 손에 넣은 타임 리프 능력을 주로 본인의 유아적이고 본능적인 욕망(주로 먹는 것)을 충족하는 데 사용하던 마코토. 그러나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고, 시간을 거듭 되돌리다가 일이 틀어져 버린다. 영화는 친구인 코스케와 그 여자친구가 전철에 치일 위기에 처하며 클라이맥스에 다다른다. 코앞에 닥친 친구의 죽음 앞에서 마코토는 자신의 무력함을 실감한다.
인간은 처음부터 명확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다. 어릴 땐 부모의 모습을 흉내 내다가, 나이가 들고 사회적 접촉이 늘어남에 따라 인간의 자아는 보다 넓어지고 깊어진다. 그 과정 중에 겪는 혼란이 곧 사춘기다. 타임 리프 능력을 손에 넣은 마코토의 모습은 사춘기에 겪는 혼란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자신의 자아는 분명 전보다 크고 강해졌는데, 그 힘을 여전히 미성숙하게 써먹다가 결국 일이 터져 버린 것이다. 다시 말해 마코토는 <우리들의 워 게임>의 디아블로몬이다. 정신적인 성숙을 유보한 채 1차원적인 욕구만을 좇으며 살아가는 존재.
그러나 마코토는 상실을 통해 변화한다. 코스케가 죽지 않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치아키가 미래로 떠나야 한다. 어느 쪽을 고른대도 마코토는 소중한 사람을 잃는 셈이다. 다시 말해 사춘기를 겪는 인간은 상실을 피할 수 없다. 성장한 자아의 한계를 통감하는 것이 사춘기의 방점이다. 이제 문제는 그러한 상실과 한계를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극복해내느냐다.
영화는 욕구의 승화를 통해 이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나 자신만을 위한 욕구에서 타인과의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이타적 욕망으로 도약함으로써, 마코토는 상실을 감내하고 막연하게만 생각하던 진로를 결정한다. 나의 한계를 피하지 않기. 나의 한계를 있는 그대로 마주하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가지기. 타인을 향해 '달려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