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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씨 도 Oct 03. 2022

쿠바의 배신(?!)

기대와 현실 사이의 간극


처음 쿠바에 대해 알게 된 건 <아메리칸 셰프>라는 영화에서다. 영화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일류 레스토랑의 셰프인  캐스퍼는 메뉴 결정 문제로 레스토랑의 오너(owner) 마찰을 빚게 된다. 이로 인해 캐스퍼는 음식평론가의 혹평을 받게 되고 화를 이기지 못해 일을 그만둔다. 그리곤 같이 일하던 동료와 함께 푸드트럭 장사를 시작하는데 그들이 파는 음식이 바로 쿠바 샌드위치.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그릴에 구워는 샌드위치가 얼마나 맛있어 보이던지! 영상을 멈추고 쿠바 샌드위치를 검색했다. 그때 처음 쿠바가 나라 이름인 걸 알았다. 그리고 실없는 다짐을 했다'~ 저거 먹으러 나중에 쿠바 가봐야겠네'



쿠바를 향한 마음이 커진 건 2018년 캐나다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할 때였다. 당시 토론토에서 지내면서 알게 된 친구들로부터 쿠바 여행에 대해 듣게 되었다. 특히 그들에게는 쿠바 최고의 휴양지라 불리는 바라데로(Varadero)가 핫(hot)했다. 바다가 아름다운 건 물론 올 인클루시브(all inclusive) 호텔을 이용하면 호텔의 부대시설 및 식음료를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어서였다. 생각보다 저렴한 가격에 솔깃했고 어디든 떠나고 싶었던 나로선 비행기로 3시간 30분밖에 소요되지 않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히론 근처의 해변 풍경 photo by 제씨



'  가볼까' 시작한 마음이 ' 진짜 야겠' 바뀌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공산주의,  게바라, 올드카, 모히또, 시가(cigar), 헤밍웨이 . 쿠바를 대표하는 단어들은  자체만으로도 이국적인 향기와 강렬한 존재감을 내뿜었다. 쿠바의 수도 아바나(Havana) 모습도 마음에 들었다. 분명 낡고 지저분한 건물로 가득  곳인데도 내게는 그것조차 예스러운 보물을 간직한  보였다. 여행자와 현지인이 사용하는 화폐가 다른 것도 인터넷 사용이 제한적인 것도 불편하기보다는 그저 낭만적으로만 느껴졌다. 무엇보다 다른 여행지에 비해 한국인이 많지 않아서 좋았다. 큰 고민 없이 쿠바행 티켓을 구매했다.


아바나의 길거리 photo by 제씨



쿠바로 떠나기 한 달 전쯤 한국에서는 쿠바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남자 친구>가 방영되었다. 쿠바에 가기 전에 이렇게 쿠바와 관련된 드라마가 나오다니. 이건 운명이 아닐까? 드라마 속 아바나의 풍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하지만 쿠바를 다녀온 친구들의 이야기는 조금 달랐다. 바라데로는 너무 좋았지만 아바나는 거리가 너무 더럽고 온갖 쓰레기와 매연 냄새로 가득해 실망했다는 것이다. 큰 기대를 하지 않기로 했다. 기대를 한껏 낮춰야 무엇이든 평타는 치니까 말이다. 적당한 기대감만 가지고 쿠바로 떠났다.


뜨리니다드의 길거리 photo by 제씨



아바나에 도착 후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쿠바 샌드위치를 먹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영화 속 샌드위치와 같이 그릴에 구운 샌드위치는 보이지 않았다. 길거리 음식이 아닌가 싶어 식당에 들어가 메뉴판을 꼼꼼히 훑어보기도 했지만 허사였다. 나중에야 안 것이지만 쿠바 샌드위치는 쿠바의 노동자들이 미국 플로리다로 이주해오면서 자신들이 먹던 샌드위치를 미국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쿠바라는 이름 때문에 당연히 쿠바에서 파는 음식이라고 착각한 내 잘못이긴 했다. 이건 뭐 중국에서 짜장면 찾는 격이었달까.



친구들이 모두 추천했던 바라데로는 가지 않았다. 휴양지에서의 신선놀음보다는 두 발로 직접 걸어 다니며 이곳저곳을 탐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예상외로 아바나가 좋았던 것 역시 바라데로를 가지 않은 이유 중 하나였다. 친구들이 말한 그대로 아바나는 골목마다 쓰레기가 넘쳐났고 거리는 올드카가 내뿜는 매연으로 가득했으나 이상하게도 나는 그곳이 좋았다. 이유를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알 수 없는 매력이 아바나를 휘감고 있는 게 분명했다. 


말레꼰 비치의 석양 photo by 제씨



세부적인 계획 없이 인-아웃 날짜만 정하고 온 쿠바였다. 하지만 처음과 끝, 그 사이의 빈 공간들은 예상할 수 없었던 일들로 채워졌다. 첫날, 밤 12시가 다돼서야 도착한 아바나 공항에서 수많은 서양인들 중 유일한 한국인이었던 친구를 만났다. 밤늦게 혼자 택시를 타는 게 무서웠는데 이 친구 덕분에 우리는 함께 무사히 공항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틀 뒤, 길을 걷다가 우연히 이 친구와 다시 마주쳤고 우리는 아바나 3대 까사 중 하나라는 호아끼나에 놀러 갔다. 그곳에서 쿠바에서의 여정에 함께할 또 다른 친구 세 명을 만났다. 사소한 것조차 신경 쓰기 싫어 외로워도 혼자 하는 여행을 추구하는 나에게 이들과 함께한 나날들은 정말이지 특별했다.


쿠바의 유명한 럼주 아바나 클럽으로 만든 프로즌 모히또 photo by 제씨



아바나를 떠나 히론(Giron)에 도착한 날, 쿠바에 왔으니 아바나 클럽(havana club)을 마셔야 하지 않겠냐며 다 함께 술을 사러 나갔다가 갑작스러운 비에 온몸이 흠뻑 젖고 말았다. 몸에 닿는 비의 시원한 감촉이 엔도르핀을 솟게 한 건지 우리는 서로를 보며 깔깔거리며 웃었고 비를 피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그 비를 온전히 느끼며 천천히 숙소로 돌아왔다. 그날 밤, 우리는 아바나 클럽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고 옥상에 올라가 새까만 하늘에 박힌 수많은 별들을 보았다. 술에 취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도 그날 밤하늘에 떠오른 별들은 지금까지도 잊히지가 않는다. 내 인생에 가장 많은 별을 본 날이었다.


숙소에서 바라본 비 오는 히론의 풍경 phto by 제씨



마크툽(Maktub)이라는 말이 있다. '기록된(written)'이라는 뜻의 아랍어로 모든 것은 신의 섭리에 의해 정해져 있음을 의미한다.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믿는 나에게 마크툽은 체념보다는 오히려 운명처럼 느껴진다. 왜 하필 난 많고 많은 날 중 1월 3일에 쿠바에 갔을까? 나를 둘러싼 일련의 상황들을 되짚어보면 이 모든 게 어떤 강력한 운명의 이끌림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게 쿠바에 온 이유가 아니었을까 생각할 만큼. 쿠바에서의 날들은 인생을 바꿀만한 경험은 아니라 해도 내 삶에 짙은 흔적들을 남긴 것만은 확실하다. 여전히 그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일까. 요즘도 난 어떤 운명이 내 앞에 '짜잔!'하고 나타날지 몹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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