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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미닉 Nov 09. 2017

연애상담일기 -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는 여자친구




알래스카와 캐나다 북부 사이의 클론다이크 지역을 가 볼 기회가 얼마나 될까? 그곳에 살고 있는 에스키모인과 조우하는 일은 상상하기도 힘들다. 


살며 우리는 끊임없이 배우고 경험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맘만 먹는다고 어디든 가고 배우고 싶은 것을 전부 배우는 일은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본다.


잭 런던의 '생의 애착'을 통해 우린 알래스카 클론다이크 지역의 에스키모인의 풍속을 엿볼 수 있다. 그 지역 에스키모인들은 계절의 흐름에 따라 이동한다. 이주과정에서 늙고 병든 사람은 남기고 떠난다. 그것이 에스키모의 잔인한 습성이 아니라 지혜임을 깨닫고, 죽음을 맞이하는 노인의 모습을 통해 삶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다.

 

간접경험을 많이 하면 할수록 삶의 다양한 면에 대해서 깊이 사고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약이 될 때도 있지만 반대로 독이 될 수도 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지만 사람은 반대인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책과 영화를 가장 많이 접하는 시기는 아마도 대학교 때 일 것이다. 아직 진로나 취업 따위로 간섭받지 않고 자유롭게 내가 원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던 그때 우리는 책과 영화, 음악에 빠져든다. 나 역시 그 시절에 밤새도록 만화방에 있어도 시간이 가는 줄 몰랐었다.


그는 대학교 졸업반 때 그녀를 만났다. 신입생 환영회 때 반했다고 했다. 그의 애절한 애정공세에 둘은 이슈의 중심에 서야 했다. 일곱 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연인 되었고, 엄청난 노력 끝에 연인이 되었기에 그는 그녀에게 최선을 다했다.


졸업을 몇 달 앞두고 그가 나를 찾아왔다.  



"곧 있으면 졸업이지? 취업 때문에 스트레스받지?"


"취업보다 여자친구 때문에 더 힘들어요!"


"여자친구에게 무조건 맞추겠다고 했었잖아. 그때랑 말이 다르다."


"알고 있어요. 저도 웬만하면 여자친구에게 다 맞춰주려고 노력했어요. 그런데 이건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뭐가 널 힘들게 하는 거야?"


"여자친구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해요!"


"상실의 시대를 쓴 무라카미 하루키 말하는 거야?"


"네 맞아요. 일본 작가요. 여자친구가 그 사람 광 팬이에요. 신간 나오면 가장 먼저 읽는 독자죠."


"그게 뭐 잘못됐니?"


"여자친구가 책을 하루에 한 권 정도 읽어요. 매일이요. 드라마랑 영화도 매일 보고요."


"책을 하루에 한 권씩 읽을 수 있나? 속독이라도 배운 거야?"


"맞아요. 어렸을 때 속독을 배웠다고 해요. 엄청 빨리 읽어서 내용을 다 알고 있나 싶었는데 기억하고 있더라고요. 미드며 일드도 가리지 않고 다 보는 편이고, 하도 봐서 자막이 없이도 볼 정도예요."


"가만히 들어보니 여자친구 자랑이잖아! 잘난 여자친구를 둬서 힘들단 소리였어?"


"비슷한데 좀 달라요. 여자친구가 책을 너무 많이 봐서 놀랐어요. 저는 책하고 거리가 좀 있는 사람이잖아요. 처음엔 신선한 매력에 좋았어요. 나이도 저보다 어린 데 모르는 게 없더라고요. 나이 차이는 문제가 될 것도 없겠다고 싶었죠. 워낙 어른스러워서요. 저는 그 나이 때 생각해보지 못한 걸 고민하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스무 살 여자치고는 너무 인생을 많이 알고 있는 게 문제였어요."


"나이에 비해서 굉장히 조숙한 사람이구나."


"조숙하고 아는 게 너무 많아요. 아는 게 너무 많아서 남들이 보이지 않는 게 보이고, 남들이 생각하지 않는 걸 생각해요."


"그건 무슨 뜻이야?"


"그러니까 젊음이라는 건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둥...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 사람과의 마지막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는 둥... 그런 소리를 들으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여자친구가 생각이 많고 책도 많이 읽어서 힘든 거구나."


"꼭 그렇게만 보진 마세요. 생각은 저도 많아요. 최근엔 너무 심각해졌어요. 걱정이 될 정도라고요."


"걱정이 될 정도라니?"


"만날 때마다 죽고 싶다는 이야기를 해요."


"왜 죽고 싶은데?"


"앞으로 살아갈 인생이 머릿속에서 다 그려진대요. 그렇게 살아가는 게 싫다고 해요. 그게 말이 되나요? 아직 살아 보지도 않았잖아요. 모르는 일을 안다고 말하는 데 미칠 것만 같아요."


"정말 죽고 싶다는 뜻은 아닐 거야. 사람들이 쉽게 미래를 예측할 때가 있잖아. 부모님이 살아가는 모습을 봐도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지 알 수 있는 거니까. 여자친구가 죽고 싶다고 말하는 건 판에 박힌 인생을 사는 게 두려운 걸 거야. 다 아는 게 아니라 알 것 같다 정도겠지. 그게 불안한 거고."


"아무리 그래도 그 말을 계속 듣는 건 너무 힘든 일에요. 그런 생각을 멈출 방법은 없나요?"


"생각을 멈출 순 없어도 돌릴 수는 있지."


"제가 어떻게 하면 되죠?"


"넌 책 좋아하니?"


"아니요."


"그럼 영화는 좋아해?"


"보긴 하는데 그렇게 좋아하진 않아요."


"어렸을 때도 그랬니?"


"특별히 그런 이야기들을 좋아하진 않았던 것 같아요. 전부 꾸며낸 이야기잖아요."


"그럼 사실만 이야기하는 다큐멘터리는 좋아하니?"


"그건 더 재미없어요."


"그럼 네가 관심 있는 건 뭐야?"


"축구요. 특히 유럽리그는 매일 관심 있게 보고 있어요. 유럽 축구계의 동향에 대해서 빠삭해요."


"축구에 관심이 많구나. 그럼 축구로 시작하면 좋을 거 같아."


"축구요? 여자친구는 축구 이야기만 하면 표정이 안 좋아지는 걸요."


"여자친구가 너보다 나이는 어려도 간접경험이 많아서 여러 분야에 관심이 많다고 했지? 역사도 좋아하지?"


"네, 역사에도 관심이 많아요."


"여자친구에게 유럽축구 이야기를 해줘. 유럽 역사와 함께. 네가 축구를 좋아하니까, 유럽의 축구 리그며 클럽의 색깔들을 유럽의 역사와 함께 이야기하면 흥미로워할 거야. 내가 잘하면 나중엔 함께 경기도 즐길 수 있을 테고."


"좋아요. 다 좋은데 그게 정말 효과가 있을 까요?"


"여자친구는 지적인 대화를 좋아하지 않니?"


"맞아요."


"넌 그런 이야기를 본능적으로 싫어하는 편이고?"


"그런 이야기는 복잡하고 고리타분해서 재미없어요."


"여자친구가 너와 사귄 이유는 아마도 그 지점일 거야. 자신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반면에 넌 지극히 단순한 편이니까."


"그런가요?"


"사람은 자신과 다른 것에 끌리는 법이야. 그런데 그것도 금방 질려 버리지. 지금쯤 너의 모든 걸 예측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어쩔 때 보면 제 마음을 꿰뚫고 있는 것 같기도 해요."


"한 가지 분야에 조예가 깊은 사람은 굉장히 매력적으로 느껴져. 어떤 분야든 상관없이 말이야. 게다가 쉽고 명쾌하게 설명해 주면 듣는 사람들이 더 좋아하겠지. 여자친구처럼 지적인 사람에겐 유럽 역사를 축구에 빗대서 설명해 주면 분명 귀를 쫑긋 하고 들을 거야. 매년 반복되는 경기지만 매년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지점을 잘 이야기해주면 더 좋을 것 같아. 단순하지만 흐름에 따라 다양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지점들을 잘 말해주면 효과가 있을 거야."


"정말 그럴까요?"


"너를 달리 보게 될 거야. 자신이 복잡하고 깊게 생각한 것들을 쉽고 단순하게 풀어낸다고 생각할 거야. 비관적인 생각들도 덜 하게 될 거고. 여자친구도 곧 알게 되겠지. 삶의 단순한 매력에 대해서... 그건 간접경험만으로 얻을 수 없는 거니까."


"저도 이제 축구만 보지 말고 역사 공부도 해야겠네요."


"그래 책도 좀 보고 살아."


"연애를 잘하려면 정말 많은 노력이 필요한 거 같아요."


"그러면서 어른이 되는 거겠지."


"그러게요. 싫어도 저절로 되는 거니까요."


이상한 일이지만, 어떤 게 두려워서 그 시간이 다가오지 않도록 무엇이라도 할 텐데, 그것은 오히려 그 일이 더 빨리 다가오게 만드는 비협조적인 습관이 된다는 거야. – J.K. 롤링, 해리포터와 불의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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