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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미닉 Nov 29. 2017

연애상담일기 - 연애하기 늦은 나이





연말연시 사람들과 한 해 동안의 이야기를 하다 보면 꼭 나오는 말이 있다. 나이를 먹어도 변하는 게 없다는 이야기들이다. 


"나이만 먹었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 같아."


그의 말을 듣다 주변을 둘러보니 참으로 그러했다. 얼굴이 변해가는 것을 제외하곤 모두가 그 전과 비슷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을 이해하려는 태도와 의식 수준이 특별히 달라지진 않았다. 오히려 그 전보다 못나진 사람들이 쉽게 눈에 띄었다.  


어릴 시절엔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면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고 모든 면에서 완벽한 사람이 될 거라고 믿었었다. 이제는 그때의 생각이 순진한 착각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실수를 하면 인정과 반성보다는 합리화하려는 습관이 몸에 배었고, 내가 한 일에 비해서 더 좋은 대우를 받기를 바라는 간사함이 커졌다.  


그녀는 미디어 활동가로 10년 넘게 일을 하고 있었다. 10년 동안 미디어 교육을 천직이라고 여기고 어린이와 노인들에서 성실한 선생님 역할을 해왔다. 그녀와는 10년 넘게 알고 지내며 연말이면 얼굴을 보며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올 해도 어김없이 그 시간이 되었다.



"올 해는 어땠어? 별일은 없었고?"


"나 내년부터는 다르게 살려고."


"다르게 산다니 무슨 말이야?" 


"이렇게 살다 간 더 비참해질 거 같아서."


"무슨 일 있었어?"


"올해 중요한 프로젝트가 전부 다 빠그라졌어. 이제 더 이상 프리랜서 일을 못하겠어. 그동안 한 번도 이렇게 된 적이 없어서 몰랐어. 프로젝트가 안 되면 일도 없고, 돈도 벌 수 없다는 사실을... 이제는 비정규직이라도 직장을 잡아야 할 거 같아."


"그러고 보니 프리랜서만 10년이 넘었구나. 올 해는 많이 힘들었겠다."


"이 바닥에서 십 년을 일 했는데 경력직으로 갈 수도 없어. 4대 보험에 든 적이 없어서... 우습지?"


"그렇구나."


"보상을 바란 건 아니지만 이 나이 먹고 뭐했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


"왜 이제는 일이 재미없니?"


"아니 이 일은 나에게 딱 맞아. 남을 가르치는 일이 나에게 천직이야. 만족도도 높고. 그래서 잘 한다고 소문도 났어. 그런데 취직하려니까. 그 경력직으로 들어가기가 너무 힘들어서. 지금은 프로젝트들이 전부 무산돼서 일을 가릴 처지도 못 되고. 그냥 내가 한심해 보여서."


"그럴 때도 있는 거지. 그래도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갖고 있는 건 대단한 거잖아."


"네 말처럼 좋아하는 일을 잘하면 잘 사는 거라고 생각했어. 게다가 전문적인 능력도 생기고 하면 남들이 알아서 대우해 줄로만 알았는데 쉽지 않네. 오히려 더 힘들어지는 것 같아."


"나도 그러네. 시간이 지날수록 더 힘들어져. 뭐랄까.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큰 시험에 드는 것 같아. 그걸 감당할 만큼 마음의 준비가 안 된 순간에 갑자기 시험에 들게 되고. 학생 딱지를 떼면 시험 걱정 없이 살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더 힘든 시험을 치러야 하나 봐."


"진짜 그런 거 같네.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 문제들까지 폭탄처럼 뻥뻥 터져서 정말 미쳐 버릴 것 같아."


"다른 문제도 있어?"


"엄마가 이제 이사 다니기 싫다고 내 이름으로 대출받아서 집을 사버렸어. 나한테 상의도 없이. 내가 일 때문에 얼마나 스트레스받는지도 모르고. 그것 때문에 무조건 직장을 구해야 하는 처지가 된 거고... 아무튼 인생 참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그럼 요즘도 연애는 안 해?"


"이젠 지칠 때도 된 것 같은데... 넌 정말 해마다 물어보는구나."


"넌 연애하고 싶다고 했으니까."


"올해 느꼈는데 난 정말 연애할 팔자가 아닌 가봐."


"왜 그렇게 생각해?" 


"이제는 연애하기도 너무 늦은 것 같아서."


"네 나이가 어때서?"


"그렇게 말하니까 더 비참하다."


"이제 서른다섯이잖아."


"이제 한 달만 지나면 서른도 꺾이는 거지."


"아직 늦은 게 아니잖아."


"넌 남자라서 모르는 소리야. 여자랑 남자랑 다르잖아."


"시간이 지나면 나이를 먹는 건 당연한 거잖아. 누구나 먹는 나이이고. 연애할 나이가 정해진 것도 아니고.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모르겠어. 너무 늦어 버렸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서. 연애를 해 본 지도 너무 오래됐고."


"그렇게 생각하지 마."


"그럼 어떻게 생각해? 대학 졸업하고 10년 동안 경력을 쌓았는데, 비정규직 일도 잡기 힘든 사람이 돼 버렸어. 그런 사람에게 연애는 사치고, 이제는 너무 늦어 버렸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나이는 숫자잖아."


"그건 광고에서나 나오는 말이고."  


"연애를 하고 말고는 네 자유이긴 해. 당연히 내가 너에게 함부로 연애를 해라 마라 할 수도 없는 거고. 그런데 네가 연애하기엔 늦어버렸다고 하니까. 그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네. 연애하는데 나이는 상관없으니까."


"남자니까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야?" 


"여자는 뭐가 다른데?"


"남자는 나이를 먹어도 아이를 가질 수 있잖아."


"연애하는 게 아이를 갖는 일이니? 너무 먼 미래까지 생각해서 미리 겁먹을 필요 없어."


"이미 늦어 버린 기분이야. 혼자서 버스를 놓친 사람처럼. 다른 사람들은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잘 살고 있는데..."


"그건 다른 사람들이지.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산다고 너도 꼭 그렇게 살 필요는 없잖아."


"아무리 그래도 늦은 건 늦은 거잖아. 나이는 이미 먹은 건데?"


"그걸 부정하는 건 아니야. 단지 늦어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어서야. 늦으면 어때? 몇 살에 연애를 해야 한다는 법칙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다른 사람보다 조금 늦었다고 이상할 거 하나도 없어. 오히려 지금 나이에 만난 사람과 더 행복해질 수도 있으니까."


"그건 모르는 일이잖아. 난 희망 고문하고 싶지 않아."


"나도 네가 희망 고문하는 걸 바라는 게 아니야. 네 말처럼 더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 연애는 고사하고 상황이 더 힘들어질 수도 있겠지. 그 상황에서도 절대 늦었다고 생각해선 안 돼."


"그럼 어떻게 생각해?"


"우선 늦었다고 생각하는 걸 멈춰야지.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더 힘들어질 테니까. 정말 좋은 인연이 찾아와도 스스로 포기하는 일까지 생길 거야. 늦었다고 생각하면 자기 합리화를 하게 될 거야. 나는 어차피 안 되는 거야라고... 그렇게 되면 인생이 너무 불행해지잖아. 지금까지 이렇게 멋지게 열심히 살아왔는데 늦었다니... 절대 늦지 않았어. 나에겐 아직 시간과 기회가 많다고 생각을 바꿨으면 좋겠어."


"말이라도 고맙네. 네 말이 맞다. 지금이 연애하기 딱 좋은 때다."


"맞아. 지금이 연애하기 딱 좋은 때야."   


나이 드는 게 비극적인 이유는, 우리가 사실은 젊기 때문이다. -오스카 와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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