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행복한 사회는 올 수 없는가
어렸을 때부터,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신문사에서 종사하시는 아버지의 밑에서 자라, 시사 라디오로 아침을 시작하고, 뉴스로 저녁을 마무리했다.
날마다 새로운 사건 사고와 불행한 이들의 소식만이 들려왔다.
그 어디에서도 행복한 이들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때부터 깨닫지 못한 사이, 마음속에는 "세상은 불행한 사람으로 가득하다"는 생각이 가득 차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행복한 사회"라는 거대한 이상을 바라보던 그 아이는 검사를 꿈꾸었다.
법이 정의고, 법을 어기는 이들 때문에 사회의 불행이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법 아래 모두를 평등하게 놓고, 그들의 잘잘못을 따져 사회의 질서를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이 거대하고도 멋있어 보였다. 하지만 법전을 펼쳐보니 세상은 달랐다. 법은 차가웠다. '법은 정답'이라고 생각했던 아이에게, 법은 '오답노트' 같아 보였다. 법이 할 수 있는 것은 '정답'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오답'인 일이 일어나면 그것을 오답노트에 적고, 같은 일이 반복되었을 때 손바닥을 때리는 것 같았다. 법의 존재 이유가 세상을 정의로 이끌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이 혼란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는 사실은 법조인의 꿈을 주춤하게 만들었다.
이제 그 아이는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식을 법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아다녔다. 그렇게, 법에 이어 두 번째로 도착한 곳은 '인식'이었다. 사람들의 인식을 바꿈으로써, 오답을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정답을 생각하게 하는 것. 그렇게 '광고'라는 방식을 선택한다.
중앙대학교 광고홍보학과에 재학 중 들었던 많은 강의 중 여전히 마음속에 살아 있는 강의는 황장선 교수의 '광고와 사회'이다. 고전적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대립을 이해하고, 이를 통해 광고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토론하는 과목이다.
고전적 자유주의는 인간의 4가지 특성을 가정한다.
1. Egoism 이기주의
2. Intellectualism 지성주의
3. Quietism 조용주의
4. Atomism 원자론
고등학생 시절, 인간의 본질과 생각을 알고 싶던 필자는 책이나 지식을 찾아보는 것보다 사색을 좋아했다. 사색 중 발견한 사실은, 인간의 모든 행위가 '생존'을 위함이라는 진리였다. 굉장한 세상의 진리를 발견했다는 그 기쁨은 이미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로 정리되어 있었다. (유사한 경험이 반복되며,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진리를 찾아낼 수 있을 거란, 오만스러운 생각은 점점 겸손함으로 바뀌어갔다.)
"인간은 본인의 생존을 위한 이기적인 존재"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던 중, 고전적 자유주의와의 만남은 운명적이었다. 이기주의와 원자론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이기주의'는 말 그대로 모든 인간이 이기적인 존재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의문이 든다. 모든 인간이 이기적으로 행동한다면, 이 사회는 혼란으로 가득하지 않을까?
이에 대한 답을 '원자론'이 제시한다.
'원자론'은 모든 인간 개인이, 마치 원자와 같이 독립된 존재로서 존재한다는 이론이다. 사회 속 개인들은 각자의 역할을 가지고 있으며,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성실히 수행할 때, 사회가 문제없이 돌아간다고 말한다.
필자는 이 지점에서 '행복'의 근원을 발견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던진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필자가 궁금해하고, 사색을 통해 발견했던 모든 사실에 대해 이미 준비된 답을 가지고 있던 세상이, 여전히 답하지 못하고 있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원자론'과 '인식'의 시각으로 정의하고자 한다.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이 행복이다.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이 행복이다. 그걸 누가 몰라?라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맞다, 그것이 행복이다. 근데 왜 질문하는 거지?라고 반문하겠다.
그런 생각이 들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만 하고 어떻게 살까. 바로 그 지점이다. 좋아하는 것만 해서는 살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이 행복이다'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어떻게 좋아하는 것만 하고 사냐'는 말은 '어떻게 행복만 하고 사냐'는 말과 같다.
어떻게 인생이 행복만 하고 살 수 있을까? 당신의 인생이 지금 행복하지 않다고 느낀다면, 행복한 것을 하라. 반대로 묻겠다. "어떻게 좋아하지 않는 일만 하고 살 수 있을까?"
좋아하는 일을 하라.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인연은 소중하다. 소중한 사람들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들에게 좋아하는 것을 하고 있는지 종종 묻곤 한다. 삶에 지친 그들은 행복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 그 물음은 "좋아하는 것을 하라"는 필자의 대답으로 이어지고, 대부분 납득한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더 근본적인 문제가 또 남아있다는 것이다.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는 것.
사람들이 삶의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좋아하는 것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던 생각은 이제 다시 물음을 던진다. "그들이 좋아하는 게 뭔데?"
다시 사색에 잠긴다. 어떻게 해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사회의 원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찾을 수 있을까. (이때, 역할은 잘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것을 말한다.)
생각은 곧바로 부딪혔다. 많은 것을 경험하는 것. 많은 것을 해봐야 좋아하는 것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방법을 찾아 나섰다. 사람들에게 많은 것들을 경험하게 해 줄 수 있는 방법이 뭘까?
우문에서 답을 찾으려니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뭔지 모르겠다"라는 말은 마치, 좋아하는 것은 완벽한 형태로 그 자리에 있고, 우리는 아직 그것을 찾지 못해, 이를 찾아가는 여정이 인생인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들은 좋아하는 것을 못 찾은 게 아니라, 못 좋아하고 있는 것이었다.
뭘 좋아하는지 모르는 게 아니라,
뭐든 좋아할 줄 모르는 것.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왜 뭘 해도 행복하다고 느끼고,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왜 뭘 해도 행복하지 않다고 느낄까? 행복한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좋아하고 있는 것이다.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좋아하는 일을 못 찾은 것이 아니라, 찾은 일을 좋아할 줄 모르는 것이다.
우리의 뇌는 구조적으로, 미지의 영역을 이상(理想)으로 채우는 기능을 한다. 코로나 때, 일명 '마기꾼'이라고 불리던 사람들은, 그들의 가려진 얼굴을 머릿속의 이상형으로 채워 상상한 뇌가 만들어낸 피해자 중 하나이며,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이유 또한 완성되지 못한 부분들을 이상적 형태로 채우는 뇌의 기능 때문이다.
연예인이 멋있어 보이는 이유도, 연애보다 썸이 설레는 이유도, 심플한 디자인이 끌리는 이유도, 대학교의 로망, 직장의 로망, 결혼의 로망 모두 미완성이 그려낸 이상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행복이 완벽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음에도, 그것이 여전히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믿는 이유는 아직 경험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경험하지 못할 미지의 영역을 뇌가 이상으로 채우기 때문이다.
행복은 뇌의 허상이다.
그러므로, 인정해야 한다. 행복은 완전한 형태로 당신을 기다리고 있지 않다. 이는 뇌의 허상일 뿐이다.
진정한 행복은 인생을 채워나가는 과정에 있다. 인생은 도착지가 정해진 레이스가 아니다.
도착지를 향해 뛰어가는 사람은, 원래 걷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
모든 사람에게는 공평하게 시간이 주어진다. 그리고 그 시간은 도착지로 가는 것을 목표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도착지가 아니라, 방향을 정해라. 방향을 정했으면 뛰지 말고, 걸어라. 그리고 걷는 그 모든 과정을 사랑하라. 걸으면서 보이는 강아지도 쓰다듬고, 꽃도 보고, 지나가던 사람과 대화도 하라. 힘들면 잠깐 쉬었다가, 비가 오면 처마에서 비를 피하라.
걷는 것을 좋아한다. 걸음을 이동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서, 걸음 그 자체를 사랑한다.
인생 또한 마찬가지다. 인생을 행복으로 가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삼아라. 인생 그 자체를 사랑하라.
하루하루를 충만하게 느끼는 것이 인생이고, 행복이다.
내가 나로서 인정받는 사회, 개인이 각각의 원자로서 인정받는 사회가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사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