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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자기 Jun 22. 2019

마타 하리와 쇼스타코비치

국립 발레단의 <마타 하리>

지난 6월 18, 19일 예술의 전당에서 작년에 이어 두 번째로 국립 발레단의 <마타 하리> 공연이 있었다. 발레 <마타 하리>는 러시아의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과 <교향곡 10번>을 사용하고 있다. 정확히는 1부에서 <교향곡 10번>, 2부에서는 <교향곡 5번>으로 극을 전개한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한 곡 공연에도 감사하는 와중에 그의 가장 대표적인 두 작품을 한꺼번에 들을 수 있다고 하여 작년 <마타 하리> 공연을 보러 갔다. 그렇다. 나는 쇼스타코비치 때문에 발레 <마타 하리>를 보았다. 결과적으로 발레 <마타 하리>는 아쉬운 점도 있었지만 기대보다 인상적이었기에 올해 <마타 하리> 공연 역시 찾게 되었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으로 풀어간 마타 하리의 이야기는 과연 어떠했을까?




1. 마타 하리는 도대체 누구인가?

 마타 하리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이국적이고 자극적인 춤, 이중 스파이, 총살당하기 전 눈가리개를 거부했다는 등의 짤막짤막한 정보가 내가 알고 있던 마타 하리의 전부였다. 그러나 이 공연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마타 하리가 누구인지에 대해 알아야 한다. 적어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그 이상으로 말이다.

마타 하리, 본명 마르하레타 헤이르트라위다 젤러(1915)

 마타 하리의 본명은 마르하레타 헤이르트라위다 젤러이다. 그는 1876년 네덜란드 레이우아르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석유사업을 했지만 젤러가 십대 초반일 때 파산하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진다. 결국 젤러는 19세이던 1895년, 신문 구혼 광고를 통해 당시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에 파견된 장교 매클라우드와 결혼한다. 남편이 된 매틀라우드는 젤러보다 스무 살 연상이었다.


 이후 젤러는 남편이 있는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살게 된다. 이곳에서 그는 인도네시아의 전통문화를 배우고 지역 무용 단체에도 참가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 처음으로 마르하레타 젤러는 후에 자신의 예명이 되는 '마타 하리'를 편지에 언급한다.


 하지만 젤러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그는 아들과 딸을 각각 하나씩 낳지만, 아들은 채 세 살이 되지 못하고 사망한다. 남편 매클라우드는 알코올의존증이 있었고, 젤러에게 가정폭력을 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결국 결혼 후 7년 만인 1902년 네덜란드로 돌아온 두 사람은 별거한다. 이 결혼은 1906년 공식적인 이혼으로 끝난다.


 1903년 젤러는 파리에 오게 되지만 여전히 생활고에 시달린다. 그러나 1905년 3월, 젤러는 파리 기메 박물관에서 이국적인 춤을 추는 무용수로 데뷔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그는 인도네시아어로 여명의 눈동자를 뜻하는'마타 하리'라는 예명을 쓰기 시작한다.  남아있는 사진을 통해서도 볼 수 있는 노출이 심한 의상과 자극적인 춤은 유럽 남성들을 사로잡는다. 마타 하리는 유럽 전역을 순회하며 이름을 떨친다. 그는 유럽 고위층 인사들과도 관계를 맺으며 이는 후에 그를 스파이로 만드는 씨앗이 된다.

무대 의상을 입은 마타 하리(1910년)


 그러나 그의 유명세는 오래가지 못한다. 그와 비슷한 춤을 추는 이들이 나타났고, 정식 무용 교육을 받지 않은 마타 하리의 춤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존재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역시 마타 하리의 경력에 영향을 준다. 이는 무용수로서 활동할 수 있는 무대가 좁아진다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유럽 전역을 돌며 명성을 쌓고, 고위층들과 관계를 맺은 마타 하리는 프랑스와 독일 정보 당국의 이목을 끈다.


 제1차 세계대전 도중 마타 하리는 프랑스와 독일 양국의 접촉을 받는다. 그는 H-21라는 독일 스파이 암호명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가 과연 스파이로서 도움이 될만한 정보를 전달했는지에 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주이다. 오히려 그가 제공했던 정보는 가십거리에 불과했고, 이것이 도리어 화를 불러일으켰다는 견해가 있다. 


 결국 마타 하리는 1917년 2월 13일,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의 한 호텔에서 체포당한다. 같은 해 7월, 마타 하리의 재판이 열리는데, 그의 죄명은 독일의 스파이로서 5만 명의 프랑스 군사들을 죽도록 한 것이었다. 마타 하리는 자신이 독일로부터 2만 프랑의 돈을 받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프랑스 측에게 심각한 타격을 줄 만한 정보를 독일에 제공한 적은 없다고 주장한다.


 재판정에는 마타 하리의 애인이었던 러시아 장교 마슬로프도 참석하지만 그는 마타 하리를 위해 증언하는 것을 거부한다. 결국 마타 하리의 스파이 활동을 입증할 구체적인 증거 없이 진행된 이 재판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마타 하리의 사형은 1917년 10월 15일 집행된다. 




2. 발레 <마타 하리> 1막과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0번>

 발레 <마타 하리>는 자바섬에서의 결혼 생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마타 하리의 삶을 다루고 있다. 1막에서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0번>, 2막에서는  <교향곡 5번>이 연주된다.


 1막의 시작은 사형 전날, 파리 감옥에서 마타 하리의 모습이다. 장면은 자바섬에서의 시절로 이어진다. 그의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않다. 어느 날, 함께 간 만찬장에서 남편은 마타 하리를 두고 떠나고, 마타 하리는 다른 장교와 춤을 춘다. 그러나 장교의 부인이 나타나 그 모습을 보고는 화를 내고, 결국 자기 자신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충격적인 사건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온 마타 하리는 남편과 다시 다투고, 결국 남편을 떠나기로 한다. 마타 하리는 자신의 딸을 데려가려 하지만 남편 매크라우드는 이를 막는다. 결국 마타 하리는 홀로 파리로 떠난다. 


 마타 하리가 홀로 집을 나서는 장면에서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0번> 1악장 클라이막스가 연주된다. 무대 정중앙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마타 하리 너머 벽에는 파리의 건물들이 비추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스쳐 지나간다. 마타 하리의 새로운 삶이 시작됨을 보여주는 이 장면은 쇼스타코비치의 음악과 어우러져 보는 이들의 공감을 자아낸다.


 장면은 파리의 한 극장 무대 뒤로 옮겨간다. 튀튀를 입고 발레 연습을 하는 무용수들 사이로 이국적인 의상을 입은 마타 하리가 등장한다. 그는 자바섬의 무용수들에게 배운 춤을 추고, 이는 극장 경영자인 아스트뤽의 시선을 끈다. 이어서 한 겹씩 베일을 벗는 마타 하리의 독무가 시작된다. 

이국적인 의상을 입고 춤을 추는 마타 하리


 그러나 이어지는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0번>의 2악장은 불길함 그 자체이다. 빠른 속도로 숨 가쁘게 질주하는 2악장의 음악은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남자 무용수들의 군무는 전쟁을 묘사한다. 남성들은 마치 전시작전을 의논하는 것처럼 책상 위에 지도를 펼치고, 그 위로 마타 하리를 들어 올린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음악 속에서 그들은 지도 여기저기를 가리키며 전쟁을 논한다. 지도 위를 걸어 다니는 마타 하리의 모습은 1막의 시작, 사형을 앞둔 파리 감옥에서의 회상이며 동시에 앞으로 마타 하리의 앞에 벌어질 일들의 예고이다. 5분이 채 되지 않는 부분이지만 음악과 안무의 어우러짐은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전쟁의 폭력성을 묘사하는 듯 한 군무와 마타 하리 (사진 : 국립 발레단 홈페이지)


 이어지는 것은 파리의 사교계이다. 여기에서는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0번> 3악장이 연주된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0번> 3악장은 특별한 곡이다. 이 곡에는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적 기호가 들어있다. 바로 레-미b-도-시로 이어지는 DSCH 모티브이다. DSCH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이름을 독일식으로 쓴 Dmitri Schostakowitsch에서 가져온 이니셜이다. DSCH 즉, 레-미b-도-시의 모티브에 주목한다면 이것이 놀라울 정도로 많이 반복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적 기호 DSCH는  <교향곡 10번> 이외에도 많은 곡에서 등장한다.


 춤곡의 느낌으로 반복되는 쇼스타코비치의 DSCH 모티브에 맞추어 파리 사교계의 사람들은 춤춘다. 춤이 절정에 달할 즈음  DSCH 모티브를 뚫고, 프렌치 호른이 연주하는 또 다른 음악적 기호가 등장한다. 새로운 기호는 미-라-미-레-라 이다. 이것은 E-La-Mi-Re-A 로 쓸 수 있는데, 굵은 글씨 부분을 모아 보면 Elmira라는 이름이 나타난다. 이는 쇼스타코비치가 <교향곡 10번>을 쓸 당시 가깝게 생각했던 엘미라 나지로바(Elmira Nazirova)라는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의 이름이다. 


 Elmira 모티브가 처음 등장하는 순간, 무대 정중앙 벽면의 문이 열리고 마타 하리가 등장한다. 듣는 이를 주목시키는 호른의 Elmira 모티브에 맞추어 마타 하리는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춤을 춘다. 그의 춤이 끝나자 박수가 나온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0번> 3악장에 맞추어 춤을 추는 마타 하리


 그러나 모든 것이 잘 되어 갈 수만은 없다. 그 불안함의 하나로 발레 <마타 하리>는 발레 뤼스라는 소재를 가져왔다. 디아길레프가 주축이 되어 1909년 러시아 황실 발레단(현 마린스키 발레단) 소속의 무용수들이 여름휴가 시즌을 이용해 파리에서 공연을 선보인 것으로 시작된 발레 뤼스는 이후 20세기 발레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발레 <마타 하리>에서도 인상적으로 등장하는 니진스키와 카르사비나는 실제 발레 뤼스의 전설적인 무용수들이다. 

발레 <세헤라자데>의 니진스키(좌), 카르사비나(우)


 극 중 마타 하리는 바로 이 발레 뤼스에 입단하려고 한다. 그러나 정식 무용 교육을 받지 않은 그가 고난도의 테크닉을 자랑하는 러시아 황실 발레단 출신 무용수들이 주축이 된 발레 뤼스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3. <마타 하리> 2막과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발레 <마타 하리>를 보며 가장 아쉬웠던 것은 내용을 따라가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특히 <마타 하리>에는 수많은 남성 배역이 등장하지만 이를 구분하기가 굉장히 힘들다. 1막에서는 그나마 장소가 명확히 구분되고, 마타 하리가 무용수로서 명성을 얻게 된다는 목표지점이 있어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남성 배역을 쉽게 구분할 수 없었다는 점은 2막에서 큰 영향을 미친다.


 <마타 하리>의 2막에서는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이 연주된다. 이 곡 역시 1막에서 연주된 <교향곡 10번>과 같은 4악장의 형식이다. 1악장이 연주되는 부분의 큰 줄거리는 마타 하리가 스파이 제안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2막 처음부터 관객은 극의 줄거리를 따라가기 어렵다. 마타 하리는 무대 한쪽에 놓인 소파에 앉아 몇 명의 남성과 번갈아 상호작용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마타 하리>에 등장하는 남성 배역의 구분이 모호하다. 이는 전체 서사에 대한 이해와 설득력을 떨어 뜨린다.


 그나마 인상 깊었던 부분은 1악장 중반에 등장하는 행진곡이다. 스파이 제안을 받지만 내키지 않아 하던 마타 하리는 행진곡이 시작되자 결국 이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 모습은 수긍보다는 조소에 가깝다. 행진곡의 시작과 함께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군인의 행진과 경례를 다소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흉내 낸다. 이어서 정보국의 사람은 마타 하리에게 몇 개의 사진을 보여준다. 이 사진들을 살펴보는 마타 하리의 모습에도 조소가 담겨있다. 무심한 태도로 사진을 살피는 마타 하리는 어떤 사진은 등 뒤로 던져버리고, 어떤 사진에는 키스를 하고, 마지막 사진은 반으로 찢어 던진다. 


  이어지는 2악장은 다시 파리 사교계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번에 사교계에서 박수를 받는 것은 마타 하리가 아니다. 화려한 의상을 입은 새로운 무용수 콜레트는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2악장의 스케르초 리듬에 맞추어 몸을 흔드는 자극적인 춤을 춘다. 파리 사교계는 새로운 무용수 콜레트에게 박수를 보내고, 마타 하리는 이를 씁쓸히 지켜본다.


  뒤이은 3악장은 Largo 즉, 느리게이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의 서정성이 집약된 이 부분에서 발레 <마타 하리>의 서사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앞서 말했듯이 남성 배역을 구분하기 힘든 점이 번갈아 등장하는 남자 무용수와 마타하리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따라가기 어렵게 만든다. 3악장 부분에서 가장 핵심적인 서사는 마타 하리와 그의 애인 마슬로프의 춤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 장교 마슬로프는 참전하게 되어 마타하리와 헤어진다. 이후 마타 하리는 전쟁 중 부상당한 마슬로프를 극적으로 다시 만나 춤을 춘다. 그러나 설득력이 부족한 서사는 마슬로프와 마타 하리의 관계에 대한 이해조차 힘들게 한다.


 마타 하리의 총살이라는 명확한 결말이 있는 4악장은 앞선 부분보다는 이해하기 수월했다. 특히 마지막 장면의 연출은 인상적이었다. 사형을 기다리는 마타 하리 주변으로 수많은 인물들이 지나가며 그를 치고, 잡아당긴다. 그때마다 마타 하리는 굴복하지 않겠다는 듯이 몸을 꼿꼿이 세운다. 이때 무대 위로는 마타 하리의 인생을 좌지우지했던 수많은 남성들을 상징하는 모자가 걸린 옷걸이가 세워진다. 총살 직전, 마타 하리는 이 옷걸이들을 일일이 쓰러뜨린다. 모든 옷걸이를 쓰러뜨린 후 마지막 음과 함께 총을 맞은 마타 하리는 바닥에 쓰러진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4악장의 피날레는 음악적으로 승리의 찬가이다. 그리고 발레 <마타 하리>의 마지막 장면은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의 피날레와 어우러져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나는 죽지만 진 것은 아니다.



 국립 발레단의 <마타 하리>는 많은 이들이 알고 있지만 정확히 알지 못하는 마타 하리를 무용수라는 새로운 시선으로 조망하였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화두인 페미니즘 이슈와 맞물려 여성의 삶을 새로운 시각에서 표현하는 이러한 시도는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페미니즘과 관련지어 생각하기에도 발레 <마타 하리>는 부족한 부분이 있다. 예를 들어 무용수 마타 하리가 그러한 자극적인 춤을 추며 명성을 쌓아야했던 이유에 대한 고민은 그다지 보이지 않으며, 마타 하리와 상호작용하는 인물이 거의 모두 남성이라는 점 등이다.


 무엇보다 가장 아쉬웠던 점은 발레 <마타 하리>의 서사가 관객들에게 제대로 와 닿지 않았다는 것이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과 <교향곡 10번>을 이용해 마타 하리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려는 시도는 몇몇 부분은 좋았지만, 전반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서사와 인물 간 상호작용으로 인해 아쉬움을 남겼다.


 그러나 역사적 인물을 새롭게 보려는 다양한 시도에 대해서는 반갑게 생각한다. 마타 하리, 그리고 쇼스타코비치는 한국 사회에서 지금까지 많이 언급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우리와 비교적 가까운 근현대사를 살았으며, 그들의 삶에는 우리가 이야기해봐야 할 거리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1906-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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