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할아버지가 임종을 앞두고 병원에 계실 때
나는 기다렸는데 결국 아무런 말씀 없이 가셨어."
가끔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소환해 이야기를 나눌 때면
아버지는 듣지 못한, 그래서 하지 못한 말들이
가슴속에 깊은 공허로 남아있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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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해야 하는 데 하지 못한 말,
하지 말아야 하는 데 내뱉은 말,
하고 싶은 데 하지 못한 말,
하기 싫은 데 해야 했던 말로
공고했던 관계도 한순간에 어긋난다.
연락을 딱 끊고 만나지 않을 수 있다면 불행 중 다행이지만,
가족이라면, 특히 부모와 자식이라면
외면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끝낼 수 없다.
사랑과 증오, 짠함과 분노 그리고 후회의
무한반복 속에서 거리조절은 항상 실패다.
상처를 주고받으면도
용서하기 어렵고 용서받기 더 어렵다.
심지어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못해 후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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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너희 형과 이야기했다.
미안하다고 했고, 형도 받아준 것 같다."
형이 고등학생이었을 때 아버지가 체벌한 적이 있다.
이 일이 두고두고 마음에 걸린다고 내게 말하셨는데,
최근 형에게 그때의 마음을,
그럼에도 체벌은 하지 않았어야 했다며
지금도 후회하고 있음을 얘기한 것이다.
한결 편안해진 얼굴과 평온한 말투에서
형의 반응을 짐작할 수 있었다.
30년이 훌쩍 지난 일로 아버지의 사과를 들었으니,
형은 마음으로 한참 울었을 것이다.
당시 어리고 여렸던 자신에 대한 연민 때문이기도 하고
이제 기력이 꺾인 아버지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기도 하겠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혹시 내게 하실 말씀은 없으신가?' 생각했다.
아버지는 집 밖에 관심이 많았고, 주위 사람들에 친절했던 터라
가족에, 특히 어머니에게 더 다정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있다.
하지만 내가 마음에 품고 있는 응어리는 없다.
대신, 아버지께 전하고픈 말이 떠올랐다.
내가 결혼을 준비할 때였다. 아버지는 결혼식을 친척들과 지인들이 많은 마산에서 하길 원했고,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서울에서 하길 원했다.
아니다.
아버지는 많은 하객과 함께 축하를 나누고 싶어 했고,
나는 소수의 인원으로 마음을 나누는 스몰웨딩을 바랐다.
부모님이 혼주가 되는 현실에서
결혼식은 신랑과 신부가 주인이라는 꿈을 꾸었던 나는
예식장을 정하고 식순, 주례, 드레스, 이동 등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힘겨루기를 했다.
아버지는 나의 소소한 반항을 무시했을지도 모르니,
갈등의 상처는 중간에 있었던 어머니 몫이었을지도 모른다.
나의 자녀가 결혼한다면 결혼식은 전적으로
자녀의 뜻에 따라 진행하며, 나는 지원하는 역할에 충실할 생각에는 변함없지만
당시 부모님에 대한 나의 의사표현이
너무도 심술궂고 유치했음을 후회한다.
이제 내 나이도 많이 꺾이고
숙취해소에도 며칠씩 걸리는 몸뚱이를 가지게 되니,
신체적으로, 경제적으로 독립하기 시작하면서
당시 내가 얼마나 네가지 없이 행동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이제야 구하는 나의 용서와 달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다른 지점에서
내게 깊은 상처를 받았을 수 있다.
때늦은 나의 고백에
"아빠니까, 괜찮아."라고
"엄마니까, 괜찮아."라고 말하시겠지.
하지만 부모니까 괜찮다는 말을 들으면
나는 홀로 뒤돌아 앉아 눈물을 뚝뚝
멈추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