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당신의 뜨락

60초 소설. 68

by 소요 김영돈

왕궁을 이전했다. 당신이 내려다볼 수 있도록 마을이 번성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등불은 아직 준비하지 못했다. 밤에는 달빛으로 밝혀야 당신이 아실까 싶었기 때문이다. 숙소 창문으로 내다보니 양지바른 당신의 거처가 손에 닿을 듯 하다. 카페에 담쟁이 순이 돋는다. 그래 담쟁이 카페에 초대할 친구들을 떠올리며 창을 통으로 내던 날들이 새록 새록새록하다. 카페 한쪽은 탁 트인 들판을 품은 복사 밭, 농부들은 늙어 복사나무 묘목을 심지 않는다. 꽃을 보는 건 나, 그리고 당신 두 사람뿐이고 익은 복숭아는 까치와 까마귀 산새의 밥이었다. 동네사람과는 왕래가 없다. 반찬을 맛 보이고 장독대에 된장을 묵히는 일은, 하지 않는다. 집, 나는 시간을 묵혀 천년의 집을 만들어 갔다. 마감 시간이 정해진 근정전, 귀퉁이와 계단이 자주 무너진다. 무너진 계단을 보수하다가 난로옆에 잠들고 있으면 5년 전 유기되었던 냥이가 놀러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격투사들의 로마 원형 경기장, 관람석을 지으려 한다. 창, 칼, 피, 굶주린 사자와 싸우는 사람들과 구경꾼들의 환호. 환호하는 군중에 한때 잘 차려입은 내가 있었다. 나는 내속에 흐르는 귀족의 품이 편했다. 운명에 사로잡힌 인간의 피와 살이 튀어도 태연한, 무례와 분노가 나에게 있었다. 뱀의 혀 같은 마음이 있었다. 사랑과 배신이 키워낸 마음이었다. 일생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배신이었다. 나는 '이런 비열하고 파렴치한 인간' 그 보다 더한 비난의 말을 찾지 못했고 상대는 웃었다. 그때부터 천둥 번개가 쳐도 보폭과 속도는 바뀌지 않았다. 고속의 차가 뒤 범퍼를 치고 되레 달려와 악다구니를 쳐도, '몸은 괜찮으세요?'보다 더 한 말을 하지 않는다.


15년의 여정~ '영화, 낭만, 예술, 자유, 건축, 도예, 청자, 사랑, 사과'


지난 가을, 사과향 가득한 와이너리를 두고 불현듯 떠난 당신을 뜨락에 모셨다.


당신이 잠든 뜨락의 적요, 그 동산의 오동이 새 순을 트는데 덩쿨손 카페에 앉아 사과와인 한잔을 앞에 두고 있다.


당신은 쓰나미에 휩쓸린 거다. 이념과 권력을 유지하려는 자들의 희생양. 동포에게 내몰린 60년의 세월이 준 선물 15년. (*동백림의 피해자 당신의 세월을 기억하며)

담쟁이 카페의 파티, 수제자, 사과 와인, 파리의 전시회, 러브 포레스트. 당신을 위해 지은 집들이 마을을 이루었다.


당신을 양지뜸에 모셔두고 담쟁이 카페에 머물고 있다. 왕궁은 밤이면 마을 집집마다 등불이 켜지고 이야기가 시작될 것이다. 절대 사라지지 않을 왕궁을 세울 것이다. 당신 뒤편으로는 왕벚, 진달래, 오동, 편백, 불두화가 필 것이다.


사과 와인 한잔을 마시고 당신 쪽 잔을 채운다. 사과 향기를 풍기던 당신의 미소, 창문너머 당신의 미소를 본다.


4월이 온다. 걱정하는 친구 몇이 소식을 전해왔다. 미안하지만 나는, 훨씬 괜찮다. 근정전을 마감하느라 당신의 부재를 깜박깜박 잊었다. 겨우 내 난로를 옆에 두고 작업에 몰두했다. 짓고 부수고 수리하고 다시 짓고 수리하고 굽고 당신이 떠오르면 끌을 놓치곤 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일찌감치 당신의 전시회를 내 몫으로 작정하셨는지.


그렇지 않다면 당신의 뜨락이,

이토록 생생하게 느껴질 리가 없다.


볕이 눈부시다.

<2026.3.27. 샹 겔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