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세이
라세 할스트롬 감독
"외모는 중요하지 않아. 오래가지 않지. 결국 얼굴엔 주름이 자글자글해지고 머리는 백발이 되고 가슴도 쳐질거야. 그러니 중요한 게 뭐겠어? 중요한 건, 어떻게 사느냐야." - 벡키
지하실에서 목 매달아 자살한 아버지와 그 일로 충격을 받아 200kg이 넘는 거구의 몸이 된 어머니 ‘보니’, 정신 연령이 어린아이 수준인 사고뭉치 막내 동생 ‘어니’와 멋 내기를 좋아하는 철없는 사춘기의 여동생 ‘엘렌’, 그리고 얼마 전에 실직해 집에 있는 누나 ‘에이미’까지.
이 가족을 지탱하고 있는 청년의 이름은, 오늘 얘기할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길버트 그레이프’이다.
이제는 세계적인 배우가 된, ‘조니 뎁’의 젊은 시절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풋풋한 모습까지 볼 수 있는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는 가족에 대한 책임과 자신만의 삶 사이에서의 균형을 잃은 길버트라는 청년이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이 영화는 짓눌린 삶의 무게 속에서도 스스로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준다.
미국의 작은 시골마을인 엔도라에 살고 있는 길버트는 작은 식료품 가게의 점원으로 일하면서 가장으로서의 책임과 가족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망 속에 살아가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가족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 때문에 마을을 떠나지 못한 채, 미래에 대한 꿈이나 개인적 여유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만을 무력하게 살아가고 있다. 매년 엔도라 마을을 지나가는 자유로운 캠핑 족들을 구경하는 것이 길버트의 유일한 낙이자 연례행사이며, 이런 지루한 생활에 지친 길버트는 동네의 카버 부인과 남몰래 관계를 갖기도 한다.
한편, 캠핑을 하며 여행 중이던 벡키는 자동차가 고장 나는 바람에 잠시 엔도라에 머물게 되는데, 벡키는 가스탱크에 올라간 어니를 따뜻하게 대하는 길버트의 모습에 호감을 갖게 된다. 길버트 역시 자유롭고 아름다운 벡키에게 끌리게 되면서 둘은 점점 가까워진다. 고장 난 자동차를 고치면 마을을 떠나야 하는 벡키와, 그녀와 함께 떠나고 싶으면서도 자신을 필요로 하는 가족을 두고 떠날 수 없는 길버트는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된다.
영화 속, 길버트의 아버지가 지어 놓은 집은 이제 가족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할 만큼 낡고 닳았다. 그러나 길버트는 목제를 구입해서 무너져가는 집의 지하실을 받쳐 놓는다. 무너져가는 집을 억지로 고치려는 모습은, 이미 붕괴 되어 가는 가족을 지탱하려는 길버트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결국 길버트 가족이 살고 있는 낡은 집은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 불안정한 가족 관계에 대한 은유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의 연장선에서, 주목할 만한 장면이 영화 초반에 등장한다. 길버트 가족이 거실에서 식사 중일 때 자폐증을 앓고 있는 어니가 아버지의 죽음을 계속해서 언급하자, 어머니 보니가 견디지 못하고 그만하라며 발을 구르고 소리치는 장면이다. 보니는 남편이 지하실에서 목을 매고 자살한 일의 충격으로 폭식증에 걸렸고, 거대한 몸을 가지게 된 인물이다. 이 장면에서 거실과 지하실의 경계인 거실 바닥이 무너질 듯 흔들리는 연출은, 보니의 이성과 무의식이 흔들리는 순간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연출은 영화 속 ‘길버트네 집’이 단순히 ‘길버트 가족’에 대한 상투적 은유가 아니라, 집의 각 층을 각각, 이드(id), 에고(ego), 슈퍼에고(superego)의 공간으로 나누어 해석할 수 있도록 만든다. (‘원초아, 자아, 초자아’ 라고도 하는 이 세 단계는 프로이트가 구분한 인격의 구조를 뜻하는 용어이다.)
길버트의 아버지가 목을 매고 자살한 지하실은 가족에게 큰 트라우마를 남긴 ‘이드’, 인간의 무의식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그리고 가족이 일상을 보내고 있는 1층의 거실은 ‘에고’, 인간의 이성을 상징하는 공간이며, 영화의 결말에서 길버트의 고충과 자신이 가족의 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어머니가 단 한번 올라가게 되는 이 집의 2층은 ‘슈퍼에고’로, 양심의 근원이기도 한 초자아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해석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연출을 생각하면서 영화의 초반으로 돌아가 어니가 보니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장면을 다시 보면, 거실과 지하실의 경계인 거실 바닥이 흔들리는 장면이 보니의 이성과 무의식이 흔들리는 장면으로도 보이게 될 것이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위태로운 거실 때문에 첫째 딸 ‘에이미’는 어머니 ‘보니’에게 2층의 침대를 권하지만 위기를 자각하지 못하는 보니는 1층의 쇼파에서 벗어날 생각도, 필요도 느끼지 못하며 딸의 제안을 거절한다. 이것은 이미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상태에 처한 길버트 가족의 현실을 보여주는 동시에 가족이 처한 문제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보니’의 모습을 보여주는 은유적인 장면이기도 하다. 때문에 영화의 결말에서 자신이 자식들에게 짐이 되고 있다는 현실과 문제를 깨달은 어머니 ‘보니’가 스스로 2층으로 올라가는 장면이 연출되어 있는 이유를, 슈퍼에고의 공간으로 들어선 마지막 ‘보니’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해석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는 이러한 상징과 은유, 함의가 담긴 메타포외에도, 다양한 긴장감을 주는 서스펜스가 존재한다. 위험한 곳에 자꾸만 올라가는 어니와, 언제 들통 날지 모르는 길버트와 카버 부인과의 불륜관계,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길버트의 집과 위태로운 가족관계의 연출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평온한 시골 마을 풍경 속에서도 긴장감을 느끼도록 만들고 있다.
이 영화의 원제목은 ‘What's Eating Gilbert Grape’ ‘무엇이 길버트 그레이프를 갉아먹는가?’이다.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길버트를 갉아 먹는 것’은 가족처럼 보이며 실제로 어느 정도는 그렇기도 하다. 그러나 이 영화를 단순히 가족 사이에서 벌어지는 몰지각을 비판하는 이야기라거나, 가족의 분열에 대한 이야기로 받아들인다면 무척이나 아쉬운 일일 것이다. 이 영화는 책임과 선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시에 가족과 개인의 삶에 대한 얘기를 담고 있다.
일본의 유명한 코미디언이자 세계적인 영화감독인 ‘기타노 다케시’는 가족에 대하여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내다버리고 싶은 것’이 가족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었다. 물론 동의하기 어려운 거친 말이지만, 이 말이 유명해진 까닭은 가족이란 그만큼이나 우리 각자의 인생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하면서도 동시에 부담스러운 우리 삶의 일부이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속 길버트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과 ‘가족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일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에서 겪는 보편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유한한 시간 속에서 인간은 자신에게 소중한 무언가를 선택하기보다는, 피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는 그런 피할 수 없는 선택과 소중한 무언가 사이에서 고민하는 길버트를 통해 관객들에게 정답 없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당신에게 가족은 어떠한 존재인가?’ 그리고 ‘당신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인 ‘어른이 되면’을 연출한 장혜영 감독은 부천독립영화관 판타스틱큐브에서 진행 된 ‘어른이 되면’ GV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 누구도 희생하지 않는 삶을 함께 살아가고 싶다”고.
서로가 희생하지 않는 방법은, 각자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깨닫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런 점에서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는 가족이라는 의무이자 짐에 갇혀, 방황하던 길버트 그레이프가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깨닫는 과정을 그린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벡키는 가족만을 생각하는 길버트에게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질문을 하고 있다.
“넌 뭘 하고 싶니?” “바라고 있는 것을 말해봐.” “중요한 건, 어떻게 사느냐야”
벡키의 질문에 길버트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다. 그동안 길버트는 그런 고민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벡키 덕분에 길버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돌아보게 된다. 길버트는 가족을 떠나 벡키와 함께 할 수도 있었지만, 어니의 생일날 가족의 품으로 돌아와 어니를 끌어안는다.
길버트는 가족이라서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가족을 선택한다.
중요한 포인트는, 어쩔 수 없이 감내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과 상황을 올바르게 인식한 상태에서 스스로 선택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희생이 아닐 것이다. 영화에서 길버트는 어니에게 자신은 아무데도 가지 않는다고 체념하듯 이야기하곤 했다. 마치 어니의 유리병에 갇힌 메뚜기처럼. 그랬던 길버트는 벡키를 만나고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 조금씩 변해간다. 절대 집밖을 나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어머니가 어니를 위해 직접 경찰서에 간 일. 절대 갈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푸드 랜드에 길버트 자신이 직접 케이크를 사러 가게 된 일. 그리고 벡키를 사랑하게 된 일들은 스스로 한계를 정해놓았던 길버트의 세계가 넓어지는 순간들일 것이다.
영화 속에서 장애를 갖고 있는 어니가 자꾸 사고를 치자, 사람들은 어니에게 아무데도 가지 말라는 말을 반복한다. 그러나 영화의 끝에서 길버트는 어니에게 그들과는 다른 말을 해준다.
“We can anywhere, if you want.”
너가 원한다면 우린 어디든 갈 수 있어.
이 영화의 원 제목은 ‘What's Eating Gilbert Grape’
‘무엇이 길버트 그레이프를 갉아 먹는가’였다. 그것은 단순히 가족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스스로 한계를 정해둔 길버트 그레이프 자기 자신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의 밖,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을 갉아먹는 스스로의 한계를 정하지 말고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찾을 것.
그리고 웃으며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해 볼 것.
"If you want."
만약 당신이 원한다면.
저자
YouTube 영화전문채널 Darksome 등에서 영화평론가로 활동하며, 시나리오와 소설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