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쓰는 마음

독서 에세이

by 마리모

구로사와 기요시, 21세기의 영화를 말한다

구로사와 기요시(지은이) 홍지영(옮긴이) 미디어버스


'이 세상에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있다'고 깨닫는 순간의 공포. 또는 '아무래도 이 세상은 이제껏 내가 믿어온 것과는 전혀 다른 듯하다'고 깨닫는 순간 느끼게 되는 도망칠 데를 잃은 암담한 기분 같은 인간의 감정을 그리는 게 호러라고 생각합니다. - 19쪽


단단한 바닥에 발을 딛고 선 안정감.

더는 추락할 곳이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안도감.

공포스러운 순간이 끝나고 긴 절망의 시간이 찾아오기 전, 그 짧은 찰나에 느끼는 최악은 지나갔다는 착각.

호러에 필수적으로 등장하는 장면이지만, 현실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종종 생각하곤 했다.

그렇게 우리는 안정과 안도를 느끼면서, 이 무서운 삶을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

최악은 이미 지나갔다고 착각하면서.


나는 이 세상이 불가해한 것들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마다 참담함을 느끼는 동시에 묘한 위안을 받는다. 그것들은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로부터 조금 덜 외롭게 만든다.

나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해 보기 위해 그리고 작은 위안을 얻기 위해 이야기를 쓴다.

언젠가 나도 누군가에게 이해당해 버리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기대를 품고.


호러 소설을 쓰지는 않지만, 그에 못지않게 무섭고 리얼한 현실을 그린 소설을 주로 쓴다.

내가 쓰는 소설들이 이른바 '사회파 미스터리' 장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당분간 읽을 책들이 사회파 미스터리 소설들이기 때문에, 아마도 앞으로 그에 대한 감상을 주로 쓰게 될 것 같다.


<구로사와 기요시, 21세기의 영화를 말한다>


<큐어>를 연출한 일본의 거장,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강연을 글로 옮긴 책이다.

얼핏 보면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강연을 그저 글로 옮긴 평범하고 성의 없는 책처럼 보이기도 한다.(그런 주제에 책값을 22,000원이나 받아? 하고 화가 날지도 모른다. 나는 그 마음을 이해한다.) 그러나 평소에는 말이나 글이 아닌 영화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생각들을 이미지가 아닌 글로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책이다. ('영화장화'라는 책도 좋다)


이 책에 실린 강연들에서 감독은, 21세기의 영화에 대한 특징들 그리고 각자의 리듬과 확신으로 영화의 쇼트를 구성하는 '감독'이라는 직업이자 예술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수많은 스텝과 배우를 설득해서 영화를 구성하는 쇼트들을 그렇게 찍어야만 했던, 이 세상의 감독과 영화를 호명하여 감독과 영화라는 관계를 이야기한다.


깊은 사유나 고민 없이 자신의 경험만을 줄줄 읊어대고, 똑같은 말을 수 십 번씩 강조하는 강연이 판치는 요즘 세상에서, 보기 드문 사유와 통찰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책이다.

영화란 카메라로 찍은 영상을 길게 연결시키는 것이 전부이지만, 내게는 이제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온갖 것들이 달라붙은, 기형적인 괴물처럼 보일 때가 많다.

이 책은 그러한 영화에 달라붙은 수많은 것들을 덜어내고, 영화의 가장 작은 구성단위인 쇼트를 통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이야기함으로써 영화라는 매체의 본질을 다시금 생각해 볼 기회를 준다.


저자

YouTube 영화전문채널 Darksome 등에서 영화평론가로 활동하며, 시나리오와 소설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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