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야기를 잘 쓰지 않게 된 이유

슬퍼지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by 버들


수개월 째 방치된 브런치에는 엄마 이야기가 열 편이나 올라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가 아프다는 걸 알게 된 뒤로 내 글의 오랜 주제이자 주된 주제는 아픈 엄마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저렇게 살아남고 올라간 글이 열 편인 것이지, 머릿속으로 썼다 지운 글을 따지면 서른 편은 족히 넘는다.


엄마가 아프게 되면서 한 말이나 행동이 내게 어찌나 꽂혔던지, 집에만 다녀오면 글이 한 편 뚝딱 나왔다. 엄마를 돌보는 아빠와 비하면 긴 시간은 아니지만, 아픈 엄마와 함께 지내는 동안에는 늘 새로운 상황이 펼쳐졌다. 가까운 기억은 없어도 오래전 이야기는 계속 반복하는 엄마를 보고서는 아직 기억이 건재하다 싶었고, 조카들 이름은 기억 못 해도 누나들 이름이나 내 이름을 외는 엄마를 보고서 아직 안심하기도 했다.


그런 일들이 쌓이고 쌓이면, 희망의 씨앗 같은 그 일을 어딘가 적어두고 싶었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치매라는 병을 가까이 두고 사는 사람들은 희망 없이 자기 삶을 잘 영위할 수가 없게 된다. 내가 알던 사람이 달라지는 걸 실시간으로 겪는 일은 말처럼 쉽지가 않다. 그게 내가 엄마 이야길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였을 것이다. 요동하는 감정의 배설이기도 했지만 나를 지키기 위한 방식이기도 했다. 글쓰기의 기원을 ‘아픔’이라고 말한 이승우의 표현이, 그제야 이해되었다.


IMG_6977.jpeg 동네 공원을 산책하고, 입구 노점에서 파는 술빵을 나눠먹었다.


“개인적 경험의 영역을 참고할 때 글쓰기의 기원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프다’이다. 이 아픔은 지극히 사적인 영역에 속해 있어서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받을 수도 없다.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고 표현하려면 똑같은 아픔을 경험해야 하는데,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 아픔은 고유하고 유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픔을 표현할 수 없는데도 표현되고자 한다. 아니, 어떤 식으로든 표현될 수밖에 없다. 표현될 수 없는 아픔을 표현하려는 욕구가 무조건 무의지적으로 만들어낸 표현, 그것이 손을 뻗는 동작이고,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에게는 소설을 쓰는 것이다. 나에게는 소설 쓰기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그러나 표현되고자 하고 표현되지 않을 수 없는 지극히 사적인 아픔을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손을 내미는 동작이었다.” (<소설가의 귓속말>, 이승우)


한 편씩 쓸 때는 몰랐는데, 모아 놓고 보니 글의 모양새가 늘 대동소이했다. 앞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 좋은 글은 아니었을 것이다. 평소엔 눈물도 잘 흘리지 않는 내가 눈물을 흘렸다거나, 눈물을 삼켰다거나, 울컥했다거나 하면서 이러저러해도 희망을 가져보자며 마무리되는 꼴이 글쓰기 방식으로 보나 구조로 보나 높은 점수는 주기 어려운 일이다. 내가 쓴 글들을 자주 다시 읽는 습관을 가진 나였기에, 그 글을 재차 보는 일은 이모저모로 고통스러웠던 것 같다(-것 같다는 말로 문장을 끝내지 않으려 애쓰지만 그렇지 않으면 끝내지 못하는 문장들이 있다).


그렇게 엄마 이야길 쓰지 않은 지 2년이 훌쩍 넘었다. 엄마와 말이 통하던 시기는 당연히 지났다. 말인즉슨 이제는 더 이상 엄마와 대화를 할 수 없다는 것. 엄마 이야길 쓰지 않고 보낸 2년은, 더 이상 엄마와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시간이었다. 그동안은 무언갈 쓰려해도 손이 멈칫거렸다. “이제는 엄마와 대화를 나눌 수 없다”라거나 “엄마가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라는 이야기를 쓰자면 그동안 쓴 모든 글 속 감정을 합쳐도 모자랄 것이다. 희망을 발견하고자 애쓰던 습관도 점차 사라졌다. 어쩌면 글로도 쓸 수 없을 만큼의 아픔이라 펜을 잡을 수조차 없었나 싶다.


엄마 이야길 쓰면서 사람이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글이 사람을 밀어가기도 한다는 걸 깊이 느꼈다. 집에만 다녀오면 별다른 고민도 없이 원고지 이삼십 장 분량의 글이 그냥 나왔으니, 글 쓰는 일을 하느라 매일 쓰던 내게도 참 신기한 일이었다. 중요하기 때문에 쓴 게 아니라 절실하기 때문에 썼다. 지금 절실하지 않느냐고 되묻는다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기적처럼 낫기를 조금 바라기도 했던 때보다는 차분해졌으니 말이다. 글이 써지지 않는 지금은 글이 나를 밀어가지 않는 때도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언젠가 엄마 이야길 다시 쓰게 될까? 확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아픔이 나를 채우고도 넘칠 때가 또 있겠지 싶다. 이 글도 냉정하게는 낙제점에 가깝지만, 지금 나에게 필요한 글이니 눈앞에 나타나주었겠지.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지, 믿고 싶은 것인지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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