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는 모두에게 재앙이다
늦은 오후, 텀블러를 들고 스타벅스로 향했다. 사이렌오더로 콜드브루 한 잔을 주문했다. '개인 컵 사용'을 선택한 터라, 픽업 장소로 가 컵을 내밀었다. 놀랍게도(?) 내가 주문한 콜드브루는 일회용 컵에 담겨 이미 나와 있었다. 내가 웅얼대자, 직원은 '코로나 감염 예방' 때문이라며 양해를 구했다. 규정이 그렇다는데 우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빈 텀블러와 일회용 컵을 양손에 들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 괜히 찜찜했다.
'코로나19가 인간에게는 재앙이지만 지구에게는 회복의 기회'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실제로 코로나19 사태 초기만 해도 깨끗해진 물과 공기를 보며 전 세계가 놀라곤 했으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타노스의 만행으로 지구 인구 절반이 사라지자, '허드슨 강에 고래가 돌아왔다'는 설정이 생각났다.
이제는 상황이 조금 달라진 것 같다. '지구가 깨끗해졌다'며 호들갑을 떨던 이들이 잠잠해지니 현실에 맞닿은 문제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인간 활동이 줄면서 이산화탄소의 배출이 줄긴 했지만, 온라인 쇼핑이나 배달 등의 비대면 활동 증가로 플라스틱, 비닐 등 일회용품 사용이 나날이 늘어 간다. 코로나19의 지속은, 기후 위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방향으로 우리를 밀어 내고 있다.
인간이 아프지 않기 위해 지구가 아파야 하고, 지구가 아프지 않기 위해 인간이 아파야 하는 상황이 돼 버렸다. 얼마 전 우연한 기회로 본 영상에서, 한 뷰티 유튜버는 이 같은 역설을 말했다. 샴푸나 클렌저에 들어가는 계면활성제에 관해 설명하는 영상이었다. 인체에 유해한 이 성분에 일정한 화학 작용을 시키면 인체에는 덜 유해해지는 대신, 환경 오염을 일으킬 수 있는 성분이 된다고. 환경 오염에 대한 가치 판단은 뒤로한 채, 성분에 대해서 설명하는 모습이 기괴해 보였다.
우리는 이 역설에서 무엇을 선택하든 멸망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누군가는 무조건 아파야만 하는 파국으로 치닫는 셈이다. 생각해 보면 인간은 지금껏 자연에 '기생'해 왔다. 상생한 적이 없었다는 측면에서 '공생'이라는 말을 쓰기는 부끄러울 따름이다. 어떤 생명도 다른 생명에 의지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는데, 인간은 무얼 믿고 이렇게 무자비하게 자연을 부수어 왔을까.
'지구가 기후 변화로 멸망했다'는 설정은 미래를 그리는 영화나 소설의 클리셰가 됐다. 기후 위기가 그만큼 '진부하고 당연한' 주제가 돼 버린 셈이다. 이 배경 설정을 핍진하다 느끼는 현실이 왜 암울하기만 할까. 막연한 희망으로 글을 끝내고 싶지는 않다. '인간이 풍요로울수록 지구는 달라진다'는 말이 심히 아리다. 이렇게 무작정 계속 달리면 멈출 수는 있을까. 영화 속 타노스가 정말 옳았던 걸까 싶어 씁쓸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