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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버들 Aug 20. 2021

말하고픈 청년 여성 노동자가 있다면

[인터뷰] 청년 여성 노동 기록 프로젝트 '소란' 태린·현정

소란의 두 운영자 현정, 태린.

코로나19 이전부터 시작된 '조용한 학살'은 코로나19 사태 이후 급증했다. 2019년의 20대 여성 자살률은 전년 대비 25% 상승했고, 2020년 상반기 20대 여성 자살률은 전년 동기 대비 43%나 급증했다. 같은 세대 남성 자살률은 줄어든 데 반해, 여성 자살률은 놀라울 정도로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한겨레>의 젠더 미디어 '슬랩'은 청년 여성들의 극단적 선택을 '조용한 학살'로 명명했다.

복합적인 요인이 있지만, 전문가들은 '취업과 일자리 문제를 포함한 경제적 요인'을 주된 이유로 꼽는다. 한국여성노동자회의 임윤옥 자문위원은 코로나19 상황에서 서비스 업종이 큰 타격을 받자, 주로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는 20대 여성이 그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분석했다. 서울대 인류학과 이현정 교수 또한 지난해 9월 국회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20대 여성들이 (노동 시장에서) 1차적인 퇴출 위험에 놓여 있다"고 분석한 바 있다.

'동아제약 성차별 면접 논란'이 청년 여성 세대의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도 주목할 만하다. 이 시대 '청년 여성'들이 일터에서 차별과 배제를 경험하고 있다는 뚜렷한 방증이다. 그럼에도 '보통 청년 여성 노동자' 이야기를 미디어에서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논란이 될 만한 이야기들이야 신문 1면을 장식하고도 남지만, 오늘도 묵묵히 일터를 견디는 이들의 이야기는 어디서 보고 들을 수 있는 걸까. 이 같은 고민을 하던 와중에 '소란'을 만났다.

소란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청년 여성의 노동 기록 프로젝트'다. 흔한 콘텐츠 같다고? 소란의 인터뷰 속 청년 여성들은 어딘가 다르다. 미디어가 정형화하던 '청년 여성 노동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소란이 그들에게 꼭 맞는 확성기가 되어주고 있기 때문인 걸까. 각양각색 소란을 생생히 전하는 이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1주년을 맞은 소란의 두 운영자 태린과 현정을, 3월 29일 서울 청파동 인근에서 만났다.



- 소란을 처음 보고 '왜 이제 알았을까' 싶었어요. 소란을 시작한 지 벌써 1년이라고요. 소회는 어떠세요.


태린 / 1년이나 하게 될 줄 몰랐어요. '언젠가 끝나는 날이 오겠지'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끝을 생각 않고 시작했거든요. 하다 보니 재밌고, 인터뷰도 들어오고, 부르는 데도 있더라고요.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필요로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죠.


현정 / 저도 1년이나 할 줄 몰랐고요. 이렇게 축하받고 스스로 기뻐할 일이 될지도 몰랐어요. '해 보자' 해서 한 건데, 어쩌다 보니까 (소란이) 제게도 큰 존재가 된 것 같아요. 그동안 많은 사람 만나서 이야기 들었던 게 뿌듯하고 기쁘네요.


두 사람은 대학 인권 동아리에서 만났다. 뒤이어 노동자·학생 연대 단체에서 함께 활동하다가 소란을 조직(?)했다. 거창한 목표를 세운 건 아니었다. 아르바이트하는 친구들이 말하는 일터에서의 경험이 때로는 재밌기도, 화나기도 했다. '나만 알기 아까운 이야기'들이 많아 써 보기로 마음먹었다.

'청년 여성도 노동의 주체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쓰기 시작한 글들이 지금까지 계속됐다. '흔한 콘텐츠 중 하나로 여겨지지 않을까' 하던 생각은 기우였다. '신선하다'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1년 동안 서른 명 남짓의 청년 여성 노동자를 만나, 스물네 건의 글과 인터뷰를 발행했다.


- 소란이 묘사하는 '청년 여성 노동자'는 어딘가 달라요. 주체적이고 단단하면서도 의연하달까요. 일반적으로 '청년 여성 노동자'하면 으레 떠오르는 모습이랑은 조금 다르더라고요.


태린 / '청년 여성 노동자의 경험'이라고 하면 쉽게 객체화되잖아요. 성희롱 당하면서 불쌍하게 일하고, 꾸밈 노동을 강요받으면서 차별적으로 일하는… 그 사람들이 어떤 노동을 하는지, 또 어떤 생각하는지는 관심이 없고 불쌍한 사람들로만 치부되는 것 같아요. 여러 방면에서 차별받는 건 사실이지만, 청년 여성이 피해자로만 그려지는 게 싫었어요. 사람 자체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게 싫었고요. 우리 모두 서사가 있는 복합적 존재인데, 단순하게 소비되더라고요.


사실 일반적으로 '청년 노동'이라고 하면 남성 육체 노동자들을 많이 떠올리고, '여성 노동'이라고 하면 큰 투쟁들 이어 나가는 '중년 여성 노동자들'을 떠올리는데요. '청년 여성 노동'은 그 중간에 있는 것도 아니고 복합적이고 또 다른 결의 이야기란 말이죠. '우리가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도 기록해주지 않겠구나' 싶었어요. '없던 일이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소란을 시작하게 된 거예요. 기록되지 않으면 쉽게 휘발되잖아요.


현정 / 우리가 '청년 여성'이라 이 이야기를 하는 것도 있죠. 그렇지만 우리가 모든 청년 여성 이야기를 아는 건 아니잖아요. 사회가 그리는 '청년 여성상'이라는 게 있지만, 그렇게 단정할 수 없는 이야기도 있을 테니 스스로 공부도 해 보고 다양한 분들 이야기도 들으면서 기록해 왔던 거 같아요.


소란이 인터뷰를 진행할 때 꼭 하는 질문이 있다. "일하면서 뿌듯했던, 좋았던 순간은 없느냐." 어떻게 보면 별것 아닌 질문인데, 청년 여성을 피해자로 객체화하고, 이슈를 부각하는 데 급급할 수밖에 없는 기성 언론에서는 보기 힘든 이야기다. 소란이 청년 여성 노동자들을 정형화하거나 규정하지 않고, 다면적인 모습을 담아내고자 노력한다는 증거다.


- 최근 동아제약의 채용 성차별 면접 논란이 있었죠. 채용 과정이나 일터에서 '여성'이고 '청년'이기에 겪는 차별이 뚜렷한데, 일부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목소리도 나오고요. 소란이 만나는 여성 노동자들이 겪는 차별의 모습은 어떤가요.


태린 / 차별이 눈에 보이지 않게, 교묘하게 퍼져 있어서 더 문제라고 생각해요. 요즘 "어디 여자가 대학을 가?", "여자는 일 못하니까 안 뽑아" 대놓고 이러진 않잖아요. 명백한 차별이라는 걸 아니까 사람들이 조심하죠. 동아제약 면접 논란이 대표적인 '교묘한 차별' 같아요. "여자가 일 못하니까 돈 적게 받는 건 당연하잖아"가 아니라 "군 가산점 제도가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말했지만, 사실상 차별적 발언이었다고 봐요.


현정 / 화나고 안타까운 일이죠. '차별이 차별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도 특징인 것 같아요. "이건 성차별이야" 했을 때, 개인적인 일이지 구조적 문제가 아니라는 반응이 먼저 나오고요. 동아제약도 처음엔 성차별을 인정하지 않았잖아요. 당사자분이 용기 내서 말하지 않았으면 채용 과정에서의 성차별이 아니라 '억울한 일'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까요. 차별이 차별로 인정받지 못하는 게 문제고 화가 나는 지점인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더 드러내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태린 / 내가 예민한 것 같고, 평판이 안 좋아질 것 같고… 남성이고 기득권이라면 하지 않아도 될 고민을 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게 여성으로서 일상에서 겪는 차별이라고 생각해요. 차별받는 여성 노동자가 많겠지만 '여기서 일하려면 문제 안 일으켜야지. 취업해야 하니까 이건 참아야지' 하면서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잖아요. 문제를 제기하기로 결심해도, 도움받을 곳을 찾는 게 쉽지 않죠.


현정 / 채용 과정에서 왜 성차별이 일어날까요? 사람을 부품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 같아요. 정직원으로 뽑으려면 오래 일할 사람 필요한데, 임신·출산하면 공백이 생기니까 생산성의 논리로 봤을 때 선호되지 않는 거죠. 성차별이 여전한데도 국가는 출산을 장려하잖아요. 문제는 사회 구조적으로 여성이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지 않았다는 건데, 개인에게 문제가 있다거나, 예민하다고 하니까 화가 나고 안타깝죠. 저희가 더 나은 말할 공간이 되어야겠다고 느껴요.


소란의 인터뷰와 글은, 제목만으로도 충분한 흥미를 준다. <진짜 여기는 망해야 한다>, <만 원에 직원 뽕 뽑는 방법>, <당일배송 한 번이라도 써본 사람 접어>, <백의의 천사, 아가씨 말고 간호사로 불러 주세요>, <나는 친절한 여성이고 싶지 않다>… "각양각색의 소란스러운 노동 경험을 가감 없이 기록하겠다"는 소란의 포부가 엿보이는 지점이다.


-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배우는 점이 많을 것 같아요. 가장 기억에 남는 인터뷰이는 누구인가요.

태린 / 초등학교 교사분들을 인터뷰한 적 있어요. 안정적이고 좋은 직업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분들도 교사 사회 안에서 겪는 어려움이 많은 것 같더라고요. 결혼하지 않은 30대 여성 교사라면, 원하지 않는데도 선 자리를 알아봐 준다고 한다거나, 학부모들이 "선생님이 애를 안 키워봐서 모른다"고 말하는 일도 있대요. '프로페셔널 교육자'인데도 "애들 놀아주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렵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요.

교사 사회에서도 지위를 가진 사람은 대부분 남성이고, 여성이면 아무리 능력 있어도 어느 정도 이상 올라가는 건 어렵고, 야망 있는 모습을 보이면 '마녀'라고 치부당하고... 교사도 '노동자'인데 성직자 같은 모습을 요구받기도 한다더라고요. 마냥 안정적이고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나름의 투쟁을 하고 있단 걸 새롭게 느끼는 인터뷰였어요.

현정 / 여성단체에서 일하는 사회 운동가분들 인터뷰했을 때가 떠올라요. 사회 운동하다 보면 '노동이 뭐냐고 생각하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많고, 저희도 그런 생각할 때가 많은데 하면 할수록 답 내리기 어렵더라고요. '종속 여부나 법에 따른 정의를 넘어 돈을 벌기 위한 일이라면 노동이 아닐까' 생각해 왔는데, 인터뷰하면서 그 생각도 깨졌어요. '임금을 받으면서 상근하면 노동이고, 임금을 안 받는 반상근은 노동이 아닌가. 노동의 가치는 누가 정하는가'와 같은 고민을 하고 계신다는데, 그 얘길 들으면서 노동을 정의 내리는 게 쉽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태린 / 저희도 여러 비정규직 노동 경험이 있지만, 장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에 다니고 있잖아요. 고졸 노동자나 비수도권 노동자들 같이 저희랑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 이야기는 잘 몰랐어요. 우리도 나름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다양한 분들 인터뷰하면서 상대적 강자성을 많이 느끼죠.


- '아, 이건 좀 더 잘할 수 있었는데' 하는 점도 있죠?

현정 / 첫 인터뷰 때 느꼈던 건데요. "가감 없이 기록하겠다"는 게 목표라고 했으면서, 괜히 '나쁜 경험' 위주로 착즙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일하다 보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있는 거잖아요. 형식적으로라도 '일하면서 뿌듯했던 일'을 물어보긴 했는데, 글로 정리할 때 흐름에 맞춘다고 삭제한 적이 있거든요. 가감 없이 기록하겠다고 했으면서… 사람들이 관심 가질 만한 이야기를 넣으려는 욕심이 저희 안에도 없지 않다는 걸 느꼈어요. 늦게서야 후회되는 부분인 것 같아요.

- 뿌듯했던 경험은요.

현정 / 저희 글에 공감하는 사람들 만났을 때죠. 처음에는 글을 올리곤 있는데 반응을 확인할 길이 없어서 몰랐어요. 저희가 인터뷰한 게 <일다>에 실린 적 있는데 공감하는 댓글을 보면서 '우리 이야기를 보고 위안을 느끼는 분들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터뷰이가 '이런 콘텐츠가 좋았다'고 말해 주실 때도 뿌듯하고요. 그럴 때 힘이 나요.

태린 / 처음부터 '세상을 바꿔야지. 사람들이 이걸 읽고 다 바뀌면 좋겠다'는 큰 목적 가졌던 건 아니거든요. 같은 '청년 여성'으로 짚어낼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거고 그런 포인트를 살려서 이야기를 기록하고 싶다는 목적이었던 거라, 글을 읽는 분들이 많이 공감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대학에서 조교로 일하는 분을 인터뷰한 적 있는데요. "공부만 하다가 혼기도 놓치고, 학위밖에 없고, 취직되는 것도 아니고. 뭐 먹고살래?" 이런 말을 많이 듣는대요. 그렇지만 후회하지 않는다고 하시더라고요. 같이 공부하는 선배들을 보면서, "공부하다가 늙어버린 노처녀 삶도 나쁘지 않고, 같이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느꼈다고요. '연대감'을 느꼈다고 하셨는데요. 청년 여성 노동자들이 저희 기록에 대해 후기를 남겨주실 때, 저도 공감하면서 읽게 돼요. 배경 설명이 필요 없는 거죠. 공감과 연대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데서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고요. 앞으로도 그렇게 하고 싶어요.

- '청년 여성 노동자의 말할 공간'이 되기 위해, 앞으로 어떻게 더 소란스러울 계획인지 알려주세요.

태린 / 소란을 하면서 많은 분 만나 뵙고 이야기를 들었고, 새롭게 알게 된 게 많았어요. 저희에게는 배움의 기회였는데요. 반대로, 저희가 만난 분들에게는 '뭐가 남았을까' 생각이 들더라고요. 소중한 시간 써서 얘기해 주는 거고, 꺼내기 어려운 얘기도 있을 거잖아요. 결국은 우리가 질문을 더 정교하게 만들고, 글을 잘 써서 더 많은 사람이 이 이야기를 알 수 있게 하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현정 / 처음 시작할 때 끝을 생각하고 하진 않았거든요. 끝이 없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지만 '할 수 있으니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요즘은 계속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직 먼 얘기일 수 있지만 나중에 일하면서도 계속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청년 여성이 더 억울한 게 없고 말할 게 없는 세상이면 좋겠지만, 그러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요.(웃음) 말하고 싶은 청년 여성 노동자가 있는 한, 계속하고 싶어요. 더 많은 분 만나서 더 많은 이야기 듣고 전할 수 있는 소란이 되겠습니다.

태린 / 언젠가 우리도 현실과 타협하는 순간이 올까 싶어요. 물론 돈 주는 사람도 없지만요.(웃음) 기성 언론의 문법을 답습하는 날이 올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지금은 아니에요.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말할 기회를 얻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전하는 활동을 계속하고 싶어요.

동아제약 성차별 면접 당사자 A 씨는, <컴퍼니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변화를 위한 '적절한 때'는 따로 있지 않다. 더 크게 떠들면 좋겠다"며 일터에서 성차별을 겪고 상처 받은 이들에게 연대와 위로의 말을 전했다. 소란이 떠들어 온 이야기도 누군가에겐 꾸준한 위로가 됐을 터. 그 소란이 가끔 주춤하고 줄어들더라도, 쉽게 멈추지 않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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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는 잡플래닛 <컴퍼니 타임스>에 게재된 콘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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