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편향과의 조우

Anchoring Effect

by 영감공장

그날따라 교수님은 특별한 말씀 없이 교실로 들어와서 빔 프로젝터를 켜셨습니다.


이탈리아의 대가족에서 태어나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말이 많아졌다며, 교실 문을 열자마자 온갖 이야기를 말 그대로 '속사포처럼 쏘아대던' 평소 그의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보였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그의 침묵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집중을 만들어냈고, 100여명 학생 모두가 숨을 죽인 채 그의 첫마디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빔 프로젝트가 예열을 마치자 교수님은 반을 두 그룹으로 나누셨습니다. 한쪽 그룹에게 눈을 감으라고 지시한 뒤, 눈을 뜨고 있던 제가 속한 그룹에게는 커다란 아프리카 대륙 지도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아래에는 짧은 문장 하나가 적혀 있었습니다.


"아프리카 대륙에는 15개의 나라가 있다."


그리고는 이번에는 우리 그룹에게 눈을 감으라 하시고 다른 그룹에게 무언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렇게 교수님의 수상한 퍼포먼스가 마무리된 후, 모두가 눈을 뜨자 교수님께서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자, 여러분 생각에 아프리카 대륙에는 실제로 몇 개의 나라가 있을까요?"


그리고는 100명에 가까운 학생 한 명 한 명의 답변을 일일이 엑셀에 받아 적기 시작하셨습니다. 강의실에는 숫자를 외치는 목소리와 키보드 타건 소리만이 울려퍼습니다.


잠시 후, 결과가 스크린에 떠올랐습니다.


저희 그룹의 평균 응답은 약 18개. 반면 다른 그룹의 평균은 약 45개였습니다.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이 무려 2.5배나 차이가 났습니다. 강의실이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교수님은 그제야 미소를 띠며 두 그룹에게 상대편이 무엇을 보았는지 알려주셨습니다.


사실 두 그룹 모두 똑같은 아프리카 대륙 지도를 보았습니다. 단 하나, 숫자만 달랐습니다. 저희가 ‘15개’라는 문장을 보는 동안, 다른 그룹은 '55개'라는 문장을 본 것이었습니다.


*참고로 아프리카 대륙의 국가 수는 통상 54개(UN 기준)로 분류됩니다. 다만 아프리카 연합(AU)에서는 서사하라를 정식 회원국으로 인정하고 있어 55개의 나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즉, '15개'라는 숫자에 노출된 그룹은 실제 국가 수를 평균 18개로 추정했고, '55개'라는 숫자에 노출된 그룹은 평균 45개로 추정한 것입니다. 처음에 접한 숫자가 전혀 다른 결론을 만들어낸 셈이었습니다.


학생들이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몰라 웅성거릴 때, 화면이 바뀌며 한 단어가 등장했습니다.


"Anchoring Effect"


닻 내림 효과, 우리 판단의 보이지 않는 닻

닻 내림 효과(anchoring effect)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과 그의 동료 에이모스 트버스키(Amos Tversky)가 발견한 대표적인 인지편향입니다. 쉽게 말해, 우리 인간은 의사결정을 할 때 처음 접한 정보나 숫자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배가 닻을 내리고 그 자리에 고정되듯, 우리의 판단도 첫 번째 정보에 '고정'되어버립니다.


닻 내림 효과의 무서운 점은 그 닻이 완전히 임의적이거나, 심지어 명백히 틀린 정보라 하더라도 여전히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에 나라가 15개밖에 없다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봐도 터무니없는 수치입니다. 하지만 그 숫자를 본 우리 그룹은 여전히 그 근처에서 맴돌았습니다. '15개는 아닌 것 같으니 조금 더 많겠지... 한 18개 정도?' 이런 식으로 말이죠.


반대로 55개라는 숫자를 본 그룹도 마찬가지였습니다. '55개는 좀 많은 것 같으니 조금 빼야겠지... 한 45개 정도?' 양쪽 모두 주어진 닻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채 조정만 했을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카너먼이 말한 '불충분한 조정(insufficient adjustment)'입니다. 우리는 닻에서 출발해 조금씩 조정하지만, 그 조정은 거의 언제나 불충분합니다. 결국 최종 판단은 처음 접한 숫자의 영향권 안에 머물게 됩니다.


가장 똑똑한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닻 내림 효과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심리학에 관심이 많아 관련 책도 많이 읽었고, 늘 인지편향의 덫에 빠지지말자고 다짐한 터였지만 그날, 저 역시 속절없이 당했습니다. 아는 것과 그것에 면역이 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습니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저만 당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M7이라고 불리는 최고의 MBA 프로그램 중 하나답게 그 강의실에는 세계 유수의 기업에서 수년간 경력을 쌓은 전문가들, 각국에서 장학금을 받고 온 수재들, 스스로의 판단력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진 자신감 넘치는 친구들로 가득했습니다. 객관적으로 봐도 대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예외 없이, 이 간단한 인지편향의 함정에 빠져들었습니다.


전략 컨설턴트 출신의 친구도, 투자은행에서 수억 달러를 굴리던 친구도, 의사결정을 직업으로 삼는 이들조차 15와 55라는 임의의 숫자에 휘둘렸습니다. 그 순간 저는 깨달았습니다. 인지편향은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이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진 사고의 구조적 특성이며, 아무리 똑똑해도 그 구조 자체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역설적인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만약 인지편향이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들만의 문제였다면, 우리 대부분은 평생 그것을 인식조차 못한 채 살아갈 것입니다. '나는 똑똑하니까 괜찮아'라는 착각 속에서 말이죠. 하지만 가장 뛰어난 사람들조차 똑같이 당한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이 주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이유를 만들어줍니다.


인지편향, 적이 아닌 동반자로

그날의 경험은 제 인생의 방향을 바꿔놓았습니다. 심리학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은 본격적인 탐구로 발전했고, 행동경제학과 의사결정 과학을 깊이 파고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금융기관에서 프로젝트 파이낸싱을 담당하고 다양한 문화권의 팀과 함께 일하는 과정에서, 인지편향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는지를 몸소 체험했습니다.


중요한 협상에서 먼저 숫자를 제시하는 것이 얼마나 유리한지, 팀원들의 의사결정을 돕기 위해 어떤 정보를 먼저 공유해야 하는지, 나 자신의 판단이 어떤 편향에 의해 왜곡되고 있는지를 알아차리는 것. 이 모든 것이 인지편향을 이해한 덕분에 가능해졌습니다.


인지편향은 제거해야 할 버그가 아닙니다. 그것은 수백만 년에 걸친 진화가 우리에게 남긴 인지적 유산이며, 빠른 의사결정을 가능하게 해준 생존 전략이기도 합니다. 다만 현대 사회의 복잡한 문제 앞에서는 때로 오작동을 일으킬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목표는 인지편향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식하고 현명하게 활용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꺼진 난로의 역설’ 이야기를 통해 우리 뇌의 작동방식과 그 이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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