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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연재 Nov 07. 2021

세상의 베아트리제에게

Love makes the world go around

사업을 하다 보면 어쩔 수없이 골프를 나가야 할 때가 있다. 너무 못 치면 동반자들의 귀한 시간에 민폐가 되니 어느 정도 경기가 될 수 있게끔 실력을 유지해야 한다. 여건상 훈련을 자주 할 수는 없고, 주말 운동 겸해서 가끔 비는 시간이 있을 때 연습을 해 둔다. 이전 주말도 겸사겸사 모처럼의 아침 시간을 반납하고 골프연습장을 찾았다.


조금 몸을 풀면서 점점 긴 클럽으로 샷을 날리고 있는 와중에 옆 타석에 한 명이 다가왔다. 30대 초중반의 여자분이었는데 혼자가 아니라 몇 명이 함께 왔다. 처음에는 타석을 하나 빌려서 같이 나누어 연습하나 보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여성 한분만 연습하러 왔고 나머지 두 분은 여동생과 그녀의 어머니인 듯했다. 이른 아침 시간이라 머리며 얼굴 단장이 되지 않은 부스스한 모습이었다.


연습하러 온 여자분이 두 명의 가족에게 이야기했다. "있잖아, 내가 말이야. 매일 새벽에 와서 연습한 거야. 잘 봐 둬, 내가 얼마나 잘하는지" 골프를 시작한 언니가 여동생과 어머니를 데리고 와서 자신의 골프 실력을 보여주는 자리였다. 이른 아침 대충 걸친듯한 우중충한 외투를 벗자 멋진 골프웨어가 드러났다. 몸매가 아름답고 예쁜 골프웨어를 입은 여성분들을 보면 가끔 '아름다운 학'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분이 그랬다.


그런데 웬 걸? 그녀의 실력은 이제 똑딱이도 못 마친 초보 중에 초보 실력이었다. 아직 250야드(yard) 아웃도어 골프연습장에 오기에는 무리인 실력으로 보였다. 공을 제대로 맞추기도 힘드니 몇 미터 앞에서 공은 이 방향 저 방향으로 춤추며 쪼르르 굴러 내렸다. 그래도 그녀는 열심이었고 기분도 좋았다. 동생은 존경의 눈으로  언니를, 엄마는 사랑의 눈으로 딸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골프장의 티칭 프로가 와서 그녀를 개인 지도해 주었다. 코칭 프로는 그녀의 스윙 단계별 동작을 이야기해주고 몇몇 동작의 자세를 잡아주었다. 황금빛 아침 햇살을 받으며 그녀는 열심히 골프채를 휘둘렀다.


20분쯤 흘렀을까? 70대 초반의 나름 정정해 보이는 남성 분이 그녀의 타석으로 다가왔다. 그 남성 분은 잠시 아무 말 없이 그녀의 골프 스윙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누굴까 궁금했는데, 이야기 나누는 걸 보니 그녀의 아버지인 듯했다. 아버지는 딸의 연습을 지켜보다 타석에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을 확인했는지 바로 프런트 데스크에 전화를 걸어 딸의 연습시간을 연장 신청했다.


곧이어 아버지가 딸에게 다가가 골프에 관한 이런저런 자신의 지식을 쏟아냈다. 담당하고 있던 골프 코치에게도 자신의 딸을 이렇게 가르쳐 달라며 일장 훈수를 했다. 아버지는 주말 아침 이른 시간에 골프 연습하는 딸을 대견해하는 눈으로 바라보며, 자신이 알고 있는 골프의 모든 것이 딸에게 전수되기를 바라는 듯 보였다.


바로 뒷 타석에서 한 여인이 골프를 치고 그녀를 응원하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의 한 가족 모습을 1시간가량 지켜보았다. 지금은 골프웨어만 멋있고 실력은 형편없지만, 저렇게도 가족의 사랑과 응원을 받으니 저분은 조만간 푸른 잔디 위에 멋진 샷을 날릴  있는 분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마리 고아한 학같은 아름다운 골퍼(golfer).



회사 인력 채용 관련해서 나는 1년에 대략 100명가량 면접을 한다. 사업의 확장과 성장을 위해서는 새로운 사고를 가진 인재가 늘 필요하므로 채용은 쉴 수 없는 일이다. 마치 신선한 산소를 온몸에 나르는 혈액처럼. 채용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일부러 자신의 인생을 힘들게 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레쥬메에 적힌 몇 가지 경력만 따라가도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하는 안따까운 인생들이 있다. S대 박사, 명문대를 나와 굴지의 외국계 기업, 모두가 꿈꾸는 국책 연구기간 등을 잘 다니다가 한 두 번의 인생 결정으로 흔히 말하는 경력이 꼬이기 시작하는 경우가 그렇다. 인생이 꼬였다는 것이 주관적인 개념이라 딱히 비율로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대략 10%의 사람(레쥬메)이 내 눈에는 저렇게까지 되지는 않아도 될 텐데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그런 사람들의 주변에 그들의 잡아 주고 이끌어 주고 사랑의 눈으로 바라봐주는 사람들이 많았다면 어땠을까? 물론 사람의 인생은 자기 자신이 판단하고 결정하는 무대라 꼭 주변 사람의 역할이 결정적이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베아트리제를 바라보는 진정으로 걱정하고 사랑하는 눈들이 많다면 안타까운 인생들은  구제될  있지 않았을까?

 

호호(昊昊)야, 너희들은 엄마, 아빠, 그리고 우리 모든 가족의 베아트리제야. 이제는 더 넓은 세상의 베아트리제가 되길 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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