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술 아저씨의 뽀시래기 시절 이야기
태어나서 첫 밸런타인데이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밸런타인데이란 걸
알게 되었다
내 짝꿍은 우리 반에서 가장
내 스타일의 여자아이였다
마르고 여우같이 생긴 예쁜 아이였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발레리나 출신이라
그 아이의 집엔 어머니의 발레니라 시절
사진들이 액자로 여러 개가 걸려있었지만
그녀의 어머니를 아무리 봐도 동일인이란
생각은 들지 않을 정도로 비만이셨다
암튼 그 아이는 우연처럼 계속 분단이 바뀌는 와중에도
내 짝꿍을 여러 번 했고 아직 정확히 남녀의 사랑이란 감정인지는
잘 몰랐지만 그 아이가 내 짝꿍인 게 참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반 아이들이 모두 세상에 밸런타인데이라는 게 있는데
남자가 여자에게 초콜릿을 주고 여자가 받으면 사랑이 이루어지는 날이라고
막 소문을 퍼트리고 다녔다
그러니까 한국에 밸런타인데이라는 게 알려지기 시작한 시기였던 것 같다
나는 매일 100원을 용돈으로 받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나는 초코파이를 사서 하굣길에
그 아이에게 주었다
그 아이는 특유의 아기 여우 같은 눈빛으로 웃어주었고
나는 막 행복했다
처음 스스로 여자에게 선물했던 기억이다
그때 우리는 하얀색 반팔 반바지 체육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백군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 모자의 고무줄 밴드는 내 통통한 턱 속에 감쳐줘 내 턱을 우습게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날은 4교시 마지막 수업이 체육이었기 때문에 그랬던 거 같다
그 소녀의 이름은 이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뭔가 채연이나 재은이 같은 그 당시 세련된
이름 중에 하나였던 거로 생각한다
아직 내 머릿속에 그 아이가 어렴풋이 남아 있다는 건 그래도 내가 뭔가 좋아했거나
관심이 있었다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나는 기억이란 건 관심의 아카이브라, 내 관심들이 쌓여 만든 거대한 저장소
같은 거라 생각한다
아마 그때의 그 체육복 소녀를 나를 기억 못 할 거다 심지어 우리가 어느 대형 마트에서
서로를 몰라보고 지나친 순간도 있었지도 모르겠다
그 체육복 소녀는 내 인생의 어느 한 부분을
만든 레고 블록처럼 내 안에 아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