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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더 Oct 15. 2023

말 1

   직장 동료와  밥을 먹는데 자연스럽게 십 대인 자녀들에 관한 이야기가 소재가 되었다. 하고 싶은 게 많고 꼭 해내고 싶어 하는 아이인데 시작에 앞서 지레 걱정을 하며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동료는 자녀의 얘기를 꺼냈다. 그럴 때면 자녀가 이해가 안 되고 답답하다고 했다. 계획을 세워서 실천하면 되지 울 때도 있다는 거다. 그런 자녀의 마음을 알아주려고 애쓰다가도 한 번씩 자녀한테 쓴소리를 하게 된다고 했다. 걱정하는 대신 우선 해보라고.


   그리고 얘기는 우리 각자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동료는 김밥을 팔아보고 싶다고 들뜬 채 말했다. K-김밥 열풍이 불고 있다며 이탈리아에 가서 김밥 장사를 하고 싶댔다. 이탈리아에 있는 지인한테 얘기하니 켈리 최의 스시가 휩쓸고 있단다. 그래도 동료는 매일 벼룩시장이 열리는 그곳에서 여행 경비를 충당할 만큼만 김밥을 말고 싶어 했다.

   "사업으로 생각해야죠."

   동료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내가 이렇게 말하자 정확히 1초만큼 정지 모션이 된 동료가 곧 크게 웃으며

   "덕분에 저랑 대화할 때의 우리 아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라고 했다.


   식사를 마치고 집에 왔는데 동료의 마지막 말이 자꾸 나를 건드렸다. 자녀의 태도에 대하여 답답함을 표현하던 동료에게 아이를 이해해 주라고만했다. 내가 롤모델로 삼았을 정도로 일을 완벽하고 야무지게 해내는 동료가 평소에 일에 대하여 나와 아주 비슷한 사업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기에 꺼낸 말 "사업으로 생각해야죠."였다. 그런데 내가 건넨 이 말에 동료는 자기가 공감을 못해줬을 때의 그의 자녀가 느꼈을 심정이 되었던 거다.


   김밥 얘기를 하면서 신이 나 있던 동료에게 먼저 '와, 그거 정말 재밌겠는데요.'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자녀 얘기를 하면서 답답해하던 동료한테 우선 '에고, 자녀의 그런 모습을 보면 갑갑하죠.'라고 했다면. 그가 평소에 찐한 사업 마인드를 보였다고 해서 그를 늘 사업적으로 대하지 않아도 되는데 나는 그를 배려한답시고 사업 얘기로 응대했다. 최소한의 여행 경비만큼만 벌려는 그에게 말이다.. 이건 마치 가사와 육아에 전념하던 주부가 집 근처 베이커리에서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을 때, '그거 해서 얼마나 번다고!'라고 말하는 배우자 같잖아. 어디 쥐구멍 없나?


   중등 교원 임용고시에서 세 번의 쓴 맛을 본 후 짐을 싸서 집으로 들어갔다. 어깨가 축 처져 있던 나를 데리고 엄마는 집 도배를 하였고, 냉이를 뜯으러 다녔다. 딸이 자기 자신을 실패자로 여기지 않도록 맑게 깨어 있게 딸을 자꾸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 OO가 저 노란 수선화 같았는데."

   라고 했다. 그런데 그 말이 내 가슴 한 복판에 톡 하고 한 방울 떨어지더니 따뜻하고 노오란 빛이 되어 나의 속속으로 퍼지는 게 아닌가. 나는 실패자가 아니야!


   대학교 2학년 겨울 방학에는 스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딱 크리스마스이브날 시작했다. 난생처음 스키장이라는 곳을 그렇게 가게 되었기에 크리스마스이브가 얼마나 바쁠지 알 리 없었다. 슬로프의 스낵에서 그야말로 불난 발바닥으로 일을 하고 밤 10시에 숙소로 갔는데, 공동 세면장 조명은 어두웠고 화장실 문은 한쪽이 문틀에서 떨어져 삐뚤게 매달려 있었다. 대충 씻고 창고 같은 방에 놓인 철제 이층 침대에 누웠는데 우풍때문에 코가 시렸다. 이불을 폭 뒤집어쓰니 기다렸다는 듯 눈물이 났다.

  

  그 주 주말에 통근 버스를 타고 집에 갔을 때, 힘이 들어서 다른 일을 찾아볼 거라고 아빠한테 말하려는 순간

   "니 나이 때는 힘든 일도 하고 그러는 거야."

   며칠 만에 얼굴을 보는 딸한테 아빠는 가장 먼저 그 말을 했다. 꿀꺽. 하려던 말을 삼키느라 내 목에서 났던 소리. 이튿날 이른 아침에 통근 버스를 타고 스키장으로 돌아간 나는 겨울방학을 꽉 채워 설원에서 어묵과 우동을 팔았다. 스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이후로 웬만한 일은 힘든 것도 아닌 게 됐다.


   엄마와 아빠가 나 잘못되라고 한 말들이 있을까. 두 분이 나를 사랑하고 믿는 그 마음을 나는 너무나도 잘 안다. 그러니 두 분이 나에게 환하고 푸근하게 말을 하든 냉랭해 보이는 말을 하든 나는 나를 위하고 아끼는 두 분의 마음을 느낀다.


   동료를 부러워하고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내 마음을 동료가 알까. 종종 내가 표현하긴 했지만 나는 무조건적인 호의가 아니라 그의 업무 태도와 실적에 감탄해마지 않는 게 아닌가. 언제라도 변할 수 있는 외적인 것을 가지고 그를 인정하는 나이기에, 그와 나 사이에는 내 부모와 나 사이에 있는 마음의 끈이 있을 수 없다. 당연히다.


   그러니까 말을 삼갔어야 했다. 편한 사이가 된 듯하여 편하게 건네는 말들이 나는 편해도 상대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마음이 통하는 사이란 연을 맺고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온 부부도, 심지어 낳는 순간부터 평생을 가슴속에 품고 산 부모와 그네의 자식 간에도 이루기가 어렵다. 내 마음과 똑같은 이가 이 세상에 나 하나 말고 또 누가 있다고. 그러니 내 마음 같지 않게 전달될 수 있는 말들을 삼가고 내가 아니라서 나와 다를 수밖에 없는 상대의 말에 먼저는 끄덕이는 게 낫겠다. 그를 이해하고 응원하고 격려하는 마음부터 전해질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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