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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al Aug 12. 2021

예민함과 몰입 사이

변화와 한계를 확장하는 방법 완결

"구원은 자기 자신 안에서 찾아야 한다.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으며, 대신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석가모니)





예술과 스포츠, 세상의 모든 분야에 뛰어난 능력을 구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특징을 관찰해보면, 의식과 무의식적 경험, 그리고 다양한 에너지를 몰입의 형태로 풀어내는데 탁월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최근 올림픽을 시청하며, 부정적 환경을 긍정적 에너지로 전환하는 선수들의 노력에 감동이 몰려왔다. 그리고 아무리 불행한 외부 환경과 훈련의 고통에도 굴복하지 않고, 역경을 이겨낸 그 모습에 가슴 한 쪽이 사무쳤다.  



고통을 이겨내는 노력과 부정적 감정의 에너지 전환, 변화의 인식은 마치 도박과 섹스, 알코올 중독 등 일상생활에서 겪는 중독의 과정과 매우 닮았다. 다만, 본인을 이롭게 하는 몰입이 아닌 스스로 타락시키는 회피의 형태지만 말이다. 근대 정신 심리학의 거장 중 한 명인 알프레드 아들러는, 누구보다 인정받고 싶어했고 프로이트의 신임을 갈망했다. 그리고 칼 구스타브 융을 질투했으며, 보잘 것 없는 초라한 모습에 다른 학자들로부터 무시와 외면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다소 거만했던 다른 학자들과 달리, 그는 따뜻한 인간미로 사람들과 마주했다. 이처럼 콤플렉스, 트라우마 등 개인의 약점을 장점으로 승화시키는 것은 이렇게 본인에 대해 정확하게 아는 것부터 시작한다.   

 


어쩌면 실체적 진실은 마음 깊은 곳에서 부정하는 나의 추악한 본성일지도 모른다. 아니, 진실의 고통을 외면하기 위해 편한 것만 추구했는지도 모른다. 부정적 감정을 긍정적 에너지로 전환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한계의 확장이 필요했다. 긍정적 습관을 끊임없이 만들고 실천하며, 순간의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 평정심과 통찰력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아무리 비관적인 상황에서도 기회를 보는 시야는, 각자의 마음가짐에 따라 달려있다고 믿는다. 지난 3개월 간, 나를 속박하는 고통을 통해 느낀 한 줌의 기회의 과정을 글에 담았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의 변화와 한계를 확장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좋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은, 일단 무조건 시작하고 본다."


모든 기회나 위기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을 때 감동과 충격이 더욱 크게 다가오는 법이다. 일과 연애, 결혼과 육아, 자기계발과 대인관계 등 나를 정의하는 모든 공간과 시간 속에서 기회와 위기는 항상 숨을 쉬고 있었다. 과정없는 결과는 없고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않는 것도 없다. 좋은 결과를 간절히 원한다면 내가 먼저 다가가야 했고, 판단은 행동 후에 해도 늦지 않다는 것을 오늘도 깨닫는다. 사무실 자판기에 동전을 넣으니 시원한 커피로 보답한다. 역시 세상 모든 일에는 항상 과정과 결과가 함께 살아 숨쉬고 있었다.    

기회와 위기를 마주하기 위해서, 나를 발전시키는 좋은 것들을 다시 한번 점검하기로 했다. 잘하고 있는 것은 보다 발전시키기로 했고, 나의 약점과 나쁜 습관은 개선하는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했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사람의 변화... 변화와 한계의 확장을 위해 일단 움직였다. 그리고 좀더 몰입을 할 수 있도록 주변을 바꾸기 시작했다. 예상을 뛰어넘는 감동과 자극을 위해서 무엇보다 자신감과 여유, 강한 멘탈이 필요했다. 실패의 쓴 잔은 일단 해보고 나서 마시면 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든, 연애를 하든, 일을 하든 운동을 하든 모두 마찬가지다.

긍정적 습관을 몸에 익히고 루틴으로 지속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나에게 한계를 뛰어넘는 발전과 순간의 기회를 잡기 위한 것이다. 기회를 알아보는 통찰력은, 나를 발전시키는 긍정적인 습관을 만들고 매일 실천해야 비로소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좋은 기회의 순간은 건강한 정신과 신체, 외부 환경 등 모든 상황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을 때 빛을 발휘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우연이라 부르지만, 이것을 기회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기회를 잡기 위한 마음가짐으로 목표를 다시 한번 점검하고, 발전을 위한 긍정적 습관은 무조건 시작하고 본다. 모든 일에 대한 두려움은 당연한 것이다. 엑셀에 대한 브레이크로 받아들이고 일단 꾸준히 가보자.



 



"어떤 것을 얻을지 보다 어떤 것을 감당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것이, 어쩌면 더욱 현명한 것일 수도 있다."


지난 3개월 동안 미친듯이 운동하고 생각하다 번아웃이 찾아왔다. 어두운 암흑의 시간, 고독의 순간이 찾아올 때면 외로움과 공허함을 느꼈다. 몸과 정신이 피곤할수록 외로움의 갈증은 더욱 심해지는 듯 했다. 현실이라는 선에서 벗어나 기대라는 마음이 날뛸수록, 허탈감이나 우울감에 괴로울 확률이 높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지고 살 수는 없다. 다시 한번 내려놓고 살아야하는 이유를 알아간다.

골프를 배우며 연습하는 동안 매일 손가락 물집과 염증, 온 몸의 통증에 고통스러웠다. 육체적 고통은 어느새 목표를 잊어버린 채 방황하는 정신 세계와 만나, 포기라는 단어를 끊임없이 속삭이기 시작했다. 사실 육체는 항상 정신의 지배를 받으며, 할 수 없다는 지시를 따를 뿐이었다. 이것이 지금 나의 한계, 그리고 한계를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의 시작이었다.

망망대해의 갈 곳을 잃어버린 키가 부러진 작은 배. 어떤 이득이나 손실을 생각하지 않고, 그냥 행위에만 집중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지름 4.3cm의 작은 공을 때리고 또 때렸다. 그러다 손과 손목, 팔과 어깨, 허리와 무릎의 타이밍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기회의 순간, 모든 고통은 금새 사라졌다. 그리고 부러진 키를 다시 고치고 나아갈 길을 찾기 시작했다. 인간은 온갖 역경에서도 결국 살 길을 찾는 두려운 존재같다.  

한계는 곧 두려움이다. 두려움이 사라지면, 한계라고 규정지었던 못난 정신 세계도 비로소 수긍하기 시작한다. 인간의 나약한 마음은 언젠가부터 나이의 한계, 외모의 한계, 능력의 한계 등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들어 냈다. 생각이 바뀌면 결과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나의 한계를 억누르고 있던 족쇄를 풀고 싶다면 변해야 한다.



한계라고 생각하는 보이지 않는 벽을 철저하게 부수는 과정, 사람들은 이것을 베니스터 효과(Bennister effect)라고 부르게 되었다.



  



"모든 잡념들을 정리하면, 비로소 한 줌의 통찰력을 얻는다."


독서, 산책, 명상, 글쓰기, 운동은 나의 정신과 육체를 정리하는 행위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청소와 빨래, 설거지, 연락처 삭제, 가계부 작성 등 인간의 모든 행위는 정리의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통찰력이 생긴다. 생각을 정제하는 과정인 메모와 글쓰기는 결국 나의 시간, 내가 살아가는 공간, 마주하는 사람들의 대한 기억을 남기고 변화와 한계를 확장하는 의식과 무의식의 행위일 수도 있다. 오늘도 나는 어제의 나를 기억하며, 현재 상태를 끊임없이 점검한다.  

명상이나 산책 등 끊임없이 생각을 하기 위한 행위들은, 나만의 생각을 정제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농축된 열매같다. 마음을 안정시키고 동기를 부여하는 아름다운 정제 과정, 이로운 습관과 루틴 형성에 새삼 놀라움을 느낀다. 그리고 생각 보다 결과가 좋다면, 이것을 행운이라 여기는 자세가 나의 행복감을 더욱 끌어올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또한 반대로 결과가 나쁘더라도, 나를 다시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라고 여기는 자세가 결국 나를 발전시키는데 이롭지 않을까. 한계를 확장하는 자세와 태도는 부정적인 습관과 생각을 차단하고, 긍정적인 생각과 습관을 만드는 것이 시작이다.

이른 새벽. 명상을 통해 오늘의 컨디션을 점검하고, 감정의 한계선을 설정한다. 수면을 방해하는 과도한 음주나 부정적 루틴은 나를 알기 위한 행위에 일절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직관의 훈련, 기회인지 아닌지 알기 위해서는 예민한 기질이 필요하다. 그리고 현재 감정선과 조율이 필요하고, 의구심이 생긴다면 타인을 통한 점검이 반드시 필요하다. 예를 들어, 상대방의 말을 민감하게 받아들이거나 편향된 의미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감정 컨트롤에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에게 좀더 집중하고 몰입하기 위해, 나에게 의미없는 타인을 버리기로 했다.

만약 어떤 일에 대해 위기 또는 기회라는 느낌이 생겼다면, 예민한 기질을 활용해 반드시 생각을 단순하게 정립해야 한다.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본인의 생각을 확인하고, 글쓰기와 메모 등 스스로 재질문 하는 과정을 통해 생각을 확신으로 바꾸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처럼 직관이란, 자기도 모르게 일어나는 모든 상황에 대한 순간적인 판단이나 생각을 의미한다. 때문에 현명한 판단을 위해서 수 많은 고통에 맞서 도망치지 말고 부딪혀야 하는 것이다.   

버려야 할 쓰레기인지 흙 속의 진주인지 알아보는 눈은 그냥 생기지 않는다. 수 많은 위기와 고통에 맞서 꿋꿋하게 맞서야 기회는 비로소 나에게 미소짓는다.





"나를 제대로 바라보기 시작한 순간부터, 더이상 분노가 생기지 않았다."


인연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무엇을 얻을지 보다 어떻게 이 사람을 감당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것이, 건강한 관계를 지속하는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다. 기대치가 높을 수록, 이후에 찾아오는 허탈감이나 우울감에 괴로울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바라보는 시선, 사람을 알아보는 눈은 내 이성이 돌아오고 나서 판단해도 늦지 않았다. 그래서 항상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사람들의 장점부터 찾았는지도 모른다.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에 부정적인 감정이 생겼다면, 무턱대고 화를 내거나 회피하는 것은 결국 본인만 괴로울 뿐이다. 인간은 언어나 행동, 표정으로 상대방에게 의사를 표현하지만, 실체적 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란 너무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부정적인 상황에 마주하며 분노하기 전, 다시 한번 상대방의 행동이나 말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내 생각과 일치하다면 상대방을 손절하거나 무시했고, 반대로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면 다름으로 인식하는 좋은 기회로 받아들였다. 

상대방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는 내 본성과 약점을 서슴없이 보여주기란 평생 힘들지도 모른다. 나만이 알고 있는 본성과 약점은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감추어 둔 실체적 진실이다. 깊은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판도라의 상자를 굳이 열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내 마음의 구원을 위해서 상대방과 발걸음을 맞춰 조금씩 열어 둘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변화와 한계의 확장은, 내 본능의 아우성이자 현실에 숨어버린 조그만 이상었다. 모든 불편한 진실을 조금씩 받아들이자 비로소 얼굴과 몸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항상 불안했던 마음이 점점 사라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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