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선명해지는 날과 흐릿해지는 날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밀도가 기억을 만든다.

by 한라봉


기억의 농도

어떤 하루는 유리컵 속 물처럼 맑고 투명하다.

빛이 스며들고, 그 속에서 부유하는 먼지까지 보일 만큼 선명하다.

진천 연곡계곡에서 발을 담그던 토요일이 그랬다.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날의 공기와 빛, 발끝에 닿던 차가움이 아직도 피부에 남아 있다.


반대로, 어떤 날은 안개 낀 유리창처럼 흐릿하다.

네 시간을 앉아 머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국물떡볶이를 먹었지만, 그 외의 장면들은 금세 사라졌다.

아무 일도 없었던 건 아니다. 다만 그 하루에 나를 머물게 하는 '핵심'이 없었다.


시간의 질, 길이가 아닌 밀도

시간의 질은 길이가 아니라 밀도로 결정된다.

한 시간이라도 온전히 몰입한 날은 오래 남고, 하루 종일 흘려보낸 날은 기억의 표면만 스친다.

우리는 종종 '바빴다'는 말로 하루를 설명하지만, 바쁨은 선명함과 비례하지 않는다.

오히려 의미 없이 가득 찬 바쁨은 기억을 더 쉽게 희미하게 만든다.




순간을 오래 붙잡는 법

하루를 선명히 기억하고 싶다.

그래서 하루를 붙잡기 위해 작은 의식을 만든다.

아이가 잠들면 설거지를 하고, 그날을 마무리하는 글을 적는 일.

운동할 시간을 따로 내기 어렵다면, 설거지할 때 배에 힘을 주고, 청소기를 밀 때 스트레칭을 한다. 그리고 그런 루틴 속에서 완전히 새로운 일을 해본다. 그 순간은 강렬한 낙인처럼 기억에 남는다.

이미 있는 시간 속에 '깊이' 심어진다.


그저 그 순간에 나를 온전히 두는 것 기억을 오래 붙잡는 방법 중 하나다.

물소리를 들으며 발끝을 느끼거나, 싱크대 거름망을 새것으로 갈아 반짝임을 바라보는 것.

수납장이 늘어나 공간이 정돈될 때 느껴지는 단단해지는 기분을 놓치지 않는 것.

욕조 물에 몸을 담그듯이 충분히 그 순간에 잠겨있다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모름 속에서 이어가는 리듬

이런 순간들은 기록할 때 더 단단해진다.

붙잡힌 하루들은 서로 연결되어, 내가 어떤 리듬으로 살아가는지 보여준다.

그 리듬은 계곡물처럼 선명할 때도 있고, 미용실의 오후처럼 흐릿할 때도 있다.


아직 그 리듬이 어디로 나를 데려갈지 모른다.

하지만 그 모름 속에서, 한 줄의 기록과 한 번의 설거지, 한 번의 숨 고르기를 반복하며 산다.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하고도 확실한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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