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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룡 Apr 26. 2022

9. 번아웃 #2

넋두리(5) - 부끄러운 고백

일의 특성 상 제작봉고를 운용할 때가 있다. 제작봉고를 운용하는 팀은 보통 막내가 제작부의 짐을 싣고 현장까지 봉고기장님이 데려다주신다. 봉고기장님의 연령대는 젊은 분들도 계시지만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 대부분이고 내가 타고 다녔던 제작봉고는 내 사수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세 번 기장님이 바뀌셨다.


좋은 기장님들이 대부분이지만 어린 제작피디들을 무시하는 기장님도 간혹 계신다.

그렇지만 내 아버지보다도 나이가 훨씬 많으신 기장님들께 화를 내는 내 사수가 (유교사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자란) 나는 참 별로였다.



당시 나에게 '실수=지구종말' 이었다

촬영이 한창 진행 중이던 어느날, 비품을 꺼내야하는데 기장님이 차 정리를 하시면서 짐이 섞여 비품을 찾지 못했다. 중요한 물건인데 나에게 묻지도 않고 정리를 해버리신게 너무 화가났다.

부끄럽지만 길거리 한 복판에서 나의 사수처럼 기장님께 화를 내고 있었다. 핑계를 대자면 현장에 나는 혼자였고 자리를 오래 비울 수가 없었다. 당시 나에게 '실수=지구종말'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원래 어른께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의 모습에 스스로 너무 놀랐다. 내가 그렇게 별로라고 생각한 내 사수를 닮아가고 있구나. 자괴감이 들었다. 촬영이 끝나고 기장님께 사과는 드렸지만 마음이 계속 불편했다.


고민 끝에 이 일을 하면서 내가 안 좋은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면 이 일을 지속할 수 없다는 결론을 냈고 사수에게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점점 피디님 같아지는 게 너무 싫다고 얘기했다.  나는 아직 이 모든 일들을 하기에 벅찬데 조금만 틀려도 쏟아지는 당신의 욕설도 이제는 참기 힘들다고 했다. (실제로 인생에서 이렇게 쌍욕을 면전에다 대고 들어본 적이 없었다.)

울지 않으려 했는데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물이 계속 나왔다. 내가 그렇게 동경하던 일을 내 입으로 그만두겠다고 하는 이 상황이 너무 억울했지만 도저히 이 일을 지속하고 싶지 않았다. 매일 출근길이 지옥같았다.


웃기게도 내 사수는 내가 본인과 닮아가는 것 같다는 점에서 크게 충격을 받고 내 의견을 받아들여줬고 곧 총괄피디님과 면담이 잡혔다. 그 때 총괄피디님이 해주셨던 말씀은 모두 마음속에 감사히 자리하고 있는데 그 중 딱 한마디. "그거 너가 다 안 해도 돼." 그 한마디가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나는 내 인정욕구에 취해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 인정이 나를 행복하게 하지 않았다. 나는 많이 성장했고 많이 배웠지만 그 밑바탕에 진정한 나의 성취가 아닌 타인의 평가와 기대가 있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다시 일을 하기로 했고 인력보충이 이루어졌다. 조금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일을 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일을 하고 있다. 남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무리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차근차근 진행했다. 모르는 건 모른다고 말했고 할 수 없는 건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막내였고 모두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줬다. 뾰족했던 가시가 점점 무뎌지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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