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희서 작가의 <묘하게 다정한 날들> 서평

by 소리글
서평에 앞서 제 개인적인 이야기가 많이 들어가, 글이 겁나 깁니다. 양해부탁드립니다.

남편의 친한 친구가 건너편 동에 살았다. 이혼하고 혼자 사는 그에게는 귀티 나게 생긴 샴고양이 두 마리가 있었다. 능력 있고 돈도 많이 버는 자유로운 영혼의 동반자로서는 그 어떤 사람보다 어울리는 새까만 얼굴에 수려한 자태의 고양이들이었다. 가까이 살았지만 그리 자주 볼 일은 없었던 그들을 자주 보게 된 건 그가 간경화를 앓고 난 뒤였다.


입원해서 오래 집을 비우는 동안 가까운 가족들도 멀리 살아서 근처에서 그를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은 남편이 유일했다. 하지만 남편은 친구를 보살필 수는 있어도 고양이는 질색인 사람이었다. 어릴 적 시골에서 살 때도 삽자루를 들고 집 마당에 키우던 개와 매일 대치하던 막내아들은 커서도 동물들이 옆에 오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다. 나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아서 동물들을 무서워했다. 길가다가도 강아지 산책하는 사람을 보면 멀리 길을 돌아갔다. 고양인들 달랐을까. 이웃집 현관에서 신발을 벗을 때부터 무표정한 냥이들의 눈을 보고 얼어서 못 들어간 적도 있다.


그런 내게 임무가 떨어졌다. 남편 친구가 중환자실에 들어간 것이다. 혹시 이럴 때를 대비해 그는 내게 미리 부탁을 했었다. 고양이들에게 물과 먹이를 주고, 배변한 감자를 캐서 버리고, 모래를 갈아주는 중대한 일을. 평소에는 홈캠이 있어서 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볼 수라도 있었지만, 이젠 한동안 집에 못 돌아올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이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누가 묻는다면 나는 ‘인류애’라고 답하고 싶은 사람이다. 용기를 내야 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주문해둔 츄르를 들고 그 집으로 향했다. 한 손에는 장우산을 든 채였다. 나를 좋아하게 만들지는 못해도 할퀴거나 공격하지는 않도록 환심을 살 간식과 최소한의 방어책이었다. 문 앞에 서서 비밀번호를 누르는데 벌써 야옹야옹 소리가 났다.


문을 열자 까만 얼굴의 두 마리 고양이들이 경계의 눈빛으로 내게 다가왔다. 온 몸에서 진땀이 나고 주저앉고 싶었지만, 일부러 아닌 척, 더 씩씩하게 목소리를 높이며 집으로 들어갔다. 마치 원래 알던 사이처럼 속일 수 있다면 나 자신부터 속이고 싶었다. 설마 곁에 다가오진 않겠지?


- 안녕, 얘들아?


높은 솔 톤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장우산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애들이 내 옆으로 몰려든다. 그리고 내 다리에 자신들의 몸을 마구 비비기 시작했다. 모녀 사이인 삐삐와 통키 중 딸인 삐삐가 유독 그랬다. 통키는 침대 위에 다시 올라가 나를 약간은 경계의 눈빛으로 지켜봤지만, 삐삐는 내 무릎에 올라와서 마치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온 몸을 비벼댔다. 가려워 보이기도 했고, 안아달라는 애교 같기도 했다. 빗이 달린 고무장갑이 보였다. 그걸 끼고 털을 쓸어주었다.


까만 내 티셔츠 위로 돌아가신 할머니의 회색 머리카락 같은 털들이 나부꼈다. 샴 고양이의 몸은 베이지와 회색이 뒤섞여서, 마치 Hermes의 인기색상인 에토프색에 가까웠다. 어쩜 이렇게 세련된 색일까 싶었다. 내가 입은 낡고 있던 싸구려 청바지와 세탁기 몇 번에 색이 날리고 있는 검정 보세티가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이제 가야 해. 또 올게.


말을 알아듣는 게 틀림없었다. 가야 한다 하면 무릎에 다시 앉거나 길을 막고 울었다. 손을 떼면 계속 비비라고 다시 얼굴을 들이댔다. 분명 익숙지 않은 손길이었을 텐데도 그랬다. 내 무릎에서 내려갈 생각이 없어보였다. 통키는 마치 자기 새끼지만 데려가라는 듯 무심했다. 그러면서도 자꾸 찾아와 얼굴을 들이댔다. 난감했다.


샴고양이들이 원래 개냥이들인가. 아니면 내가 그들을 위해 해준 일들에 감사하는 걸까. 나도 알 수 없었다. 모래화장실에 흙을 사다가 갈아주고, 스트레스로 헤드볼 토한 거, 똥테러한 거 다 치워주고, 매일 하루 두 번 이상 들러서 에어컨 온도 조절까지 해줬으니, 고마웠을 만도 했겠다. 그래서였는지 당시 드라마를 쓰면서 이리저리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보다, 냥이들이 내게 백배는 더 다정했다.


주 4일 이상 들렀더니 나도 머릿속에 그 냥이들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집에 갈 때도 노하우가 생겼다. 야옹거리며 가지 말라고 나를 막는 냥이들에게 알았다고 도로 들어가자고 하면 신이 나서 다시 쫓아 들어갔다. 그 때 나는 재빨리 문을 열고 나와 닫아야 했다. 문 사이에 얼굴을 디밀어서 다시 들어간 적도 있다. 결국 남겨진 슬픔으로 구슬프게 목 놓아 우는 아이들의 소리를 엘리베이터 너머 환청처럼 들으며 돌아가야 했다.


중환자실에서 회복한 남편 친구는 야윈 모습으로 고맙다고 몇 번이나 인사를 왔다. 하지만 샴고양이들을 닮아 까매진 그의 낯빛과 마른 몸은 앞으로 남은 생이 그리 오래지 않을 거란 걸 보여줬다. 그가 얼마간 더 살았었는지 기억이 나진 않는다. 어느 날 연락이 되지 않는 친구의 집으로 급히 향했던 남편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전화가 왔고, 그가 먼 길을 떠났음을 알렸다. 눈을 감고 세상을 떠난 그의 영혼을 애도했다. 이 세상에 그가 와서 남기고 간 게 무엇일까.


슬펐고 애달팠다.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했더라도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한동안 울고나니 삐삐와 통키가 걱정됐다. 하루 동안 아빠의 시신을 옆에 두고 있었을 아이들의 마음을 달려가 안아주고 싶었다.


마치 내가 그 냥이들을 맡아야 할 것만 같았다. 그 한여름, 몇 주의 시간동안 내가 그들의 보호자가 됐던 기억 때문일까. 데려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물론 그건 가족들의 동의가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보다 더 고양이를 무서워하는 막내와, 무엇보다 애완동물을 원치 않는 남편 때문에 결국은 불발이 됐다. 죄책감이 들었다.


결국은 남동생이 데려갔다고 들었다. 그 뒤로 고양이들만 보면 삐삐와 통키가 생각났다. 여전히 겁이 많아 만지지도 못하지만 삐삐와 통키라면 꼭 안고 잘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누군가의 마음에 들어온다는 건 그런 일이다. 단단하고도 특별한 일. 마음에 심어진 질긴 정이란 건, 비바람에 그 흔적이 덮어질 뿐, 절대 뿌리가 뽑히지 않는다. 며칠이건 몇 달이건 혹은 몇 시간을 만났건 간에, 나는 잠시 그 고양이들의 집사였다. 내 마음에는 여전히 삐삐와 통키가 살고 있다.



나와는 다르게 묘생이 다하는 날까지 고양이들의 엄마가 되어주기로 결심한 한 여자를 만났다. 책 <묘하게 다정한 날들>을 통해서였다. 서평이라면서 무슨 A4 2장 분량의 서사를 서두로 풀어 놓냐고 불만인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소설쓰기를 간절히 바라는 저자를 개인적으로 알기에 그녀는 불평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고양이보다 눈이 더 크고 예쁜 희서 작가가 쓴 이 책은 내가 경험한 고양이들과의 이별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시종일관 따뜻하게 나를 그루밍해주는 느낌이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겪는 공황장애는 누구의 탓도 아니지만, 누가 쉽게 해결해줄 수도 없는 문제다. 저자는 갑자기 찾아온 공황장애로 인해 운전도, 직장도 그만둬야 했다. 뱃속의 아이를 잃을 뻔 했고, 청소기를 돌리고,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야말로 ‘평범한 일상이 누군가에겐 여전히 풀어나가야 할 과제이고 도전이 될 수’(p.32) 있는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그녀는 두 아이를 키워내고, 공부방을 하면서, 또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하는 잔잔한 일상 속에서 이 모든 걸 극복해나간다.


우리 약해서 다행이다. 서로를 보듬으며 살아갈 수 있으니까.(p.33)

그녀가 두 고양이, 베리와 루이를 보는 시선은 약자가 아니라 공감으로 이어져있다. 그녀에게 고양이들과 함께 하는 삶은 누군가를 돌보는 일상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생활방식이다. 희서 작가가 없으면 외로워 자기 몸을 핥아대다 심인성 탈모가 걸리는 고양이를 상상해보라. 그리고 모났던 고양이가 사르르 녹아드는 과정을 보며 나이가 든다는 게 조금 더 세상을 부드럽게 보는 것이라 배워가는 사람도. 그들은 어느 한쪽의 돌봄 관계가 아니다. 그래서 작가는, 타고난 예민함이 공감과 연결된다는 것도, 아이들은 자연스레 커간다는 것도, 기다림도, 공황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도 모두 고양이들과 함께 하며 배웠다 말한다.


이 집에는 변기에서 쉬를 하고 사람 말을 하는 고양이들이 산다. 믿기 어려운가. 책을 읽어보라. 분명 그런 존재들이 있다. ‘엄마’라고 말하기도 하고, ‘네?’라고 묻기도 한다. 일찍부터 엄마와 떨어져 산 동물들이 다른 존재의 언어를 습득하며 특별한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렇게 웃다가 어느 페이지에서 나는 삐삐와 통키를 떠올렸다. 고양이는 대체로 사람을 덩치 큰 고양이로 본다고 한다. ‘고양이에게 사람은 수직 관계가 아닌, 수평 관계란 것이다.’ (p.145) 진짜 엄마에게 자식이 툴툴거리듯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고양이들의 태도를 빗댄 이야기이다. 서로에게 진심이었던 그 때 그 한여름의 서툴렀던 나를 그 냥이들은 엄마로 생각했던 걸까. 끊임없이 애정을 갈구하고 울어대던 그 아이들을 내가 왜 거두지 못했을까, 다시 한 번 한이 됐다. 그리고 우리의 인연이 거기까지였다면, 언제까지나 그들의 행복을 빌어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는 것을 항상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세상은 내가 감당하기엔 몹시 크고 잔인했다.’(p.104)

어쩌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나 공황은 과거의 기억에서부터 시작될 지도 모르겠다. 지켜주지 못했던 강아지와의 과거로부터 작가는 ‘생명은 결국 한 줌의 재’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도 배웠지만, 그 모든 기억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과정을 통해 동물들에 대한 사랑을 실천해나간다. 어떻게 이 작가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무엇보다 희서 작가가 사랑스런 베리와 루이를 통해 우리에게 건네는 위로는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았다. 내가 살아가는 오늘 하루 만나는 사람에게 너무 마구잡이로 다가가지 않으면서도, 고양이처럼 다정하게, 따뜻하게 남으라는 것이었다.


억지로 다가가지 않되, 필요할 땐 곁에 있어 주는 사람으로.

말보다 따스함을 먼저 건네는 사람으로.

그렇게 누군가에게 다정한 존재로 남을 수 있다면,

잘 살아 낸 오늘일 것이다. (p.182)


책을 덮은 후에도,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사람에게서 치유받는 고양이가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는 그녀의 말이 내 귀에 계속 맴돌았다. 삐삐와 통키가 새로운 가족과 함께 추억을 만들고 있기를. 그리고 희서작가가 고양이들과 따뜻한 햇살 가득한 창가에서 늘 행복하기를.

단숨에 읽히지만 기억하고싶은 이야기들
2019년 삐삐와 통키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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