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훈 기자의 <차별을 훔치는 남자들>을 읽고
최근 시아버지 제사에 전을 잔뜩 구워갔다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었다. 일요일이라 문을 연 전집이 없어 급히 재료를 사서 손수 다 부쳤다고 했다. 지난 명절에 어쩌다 구워간 전이 인기가 좋았던 탓이다. 이번에도 당신이 해야겠다며 은근히 기대하는 남편의 말에, 결국 굽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친구는 주말에도 일을 한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 고생해 만든 전은 또 인기가 폭발이었고, 남편의 어깨는 올라갔다. 친구는 몸살이 났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서운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자신에게 안부를 묻는 친척이 단 한명도 없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한탄했다. 왜 이렇게 사는지 모르겠다고. 그리고 반쯤 농담처럼 말했다. “우리 딸들은 시집보내지 말자.”
물론 요즘은 제사가 사라진 집도 많고, 며느리를 독립된 존재로 존중하는 분위기도 늘었다. 나 역시 시어른들이 안 계셔서 제사 준비가 자유로운 편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많은 여성들이 여전히 좀 억울하고 몸이 아프더라도, 웃으며 자리를 지킨다는 것을. 반면 남성들은 그런 자리에서 훨씬 편하게 앉아 과일을 먹는다는 것을. 한국 사회에서 결혼은 아직 완전히 공정한 판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런 현실을 매번 겪는 나와 친구들은 모두 페미니스트들이어야 맞다. 하지만 우리 중 아무도 그렇지 않다. 여성으로 살아왔고, 차별에 대해 모르는 사람도 아닌데, 페미니즘이라는 단어 앞에서 우리는 늘 머뭇거린다. 기울어진 구조 속에 살면서도 그 구조를 말하는 언어는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다. 불만을 가지는 것과 반기를 드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 담론을 광장으로 끌고 나오는 순간, 과한 사람이 되거나 젠더 갈라치기에 앞장서는 사람으로 취급받기 일쑤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 앞에서 망설이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그렇게 보고 자랐다. 나서서 분란을 만들지 않는 게 현명한 아내이자, 며느리의 역할임을 엄마들 세대를 보며 배웠다. 남성들은 또 어떠한가. 아내들을 위해주고 제사 준비를 도와주기 때문에 자신들이 옛날보다 훨씬 나은 깨우친 남성, 성평등적인 태도를 가진 남편이라며 많이 양보한 듯한 태도를 취한다.
이 책은 여기서 출발한다. 저자는 한국 사회의 젠더이슈를 ‘도깨비 도로’에 비유한다. 실제로는 내리막이지만, 주변 지형이나 나무로 인해 오르막으로 보이는 착시현상을 말한다. 여전히 내리막길인 여성에 대한 차별을 이제는 오르막이 되지 않았냐고, 도리어 남성들이 ‘역차별’을 받고 있지 않느냐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페미니즘이 오히려 젠더갈등을 야기한다는 왜곡된 시각의 뿌리까지 저자는 집요하게 파헤친다.
<차별을 훔치는 남자들>을 끝까지 읽어내는 일은 솔직히 말해 어느 정도의 각오가 필요했다. 하지만 읽다보니 이 책은 차별을 단순히 나열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어떻게 권력화 되고, 왜곡되어왔는지를 분석하고 있었다.
“한국 사회는 개인의 혼란과 실패에 대해 구조적 원인을 숨기고 개인의 탓으로 돌려왔다.”(p.215)
저자는 젠더 갈등을 20대 남성의 ‘공격적인 반페미니즘’같은 특정 세대의 문제로만 환원하지 않는다, “아직도 남자 어른들이 관성과 시스템의 ‘수호신’으로 버티고 있기‘때문”(p.191)이라 지적한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우리 사회의 성불평등적인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역설한다.
“안티 페미니즘과의 애매한 공존은 길이 될 수 없다”(p.123)는 문장은 저자의 분명한 방향성을 드러낸다. 피해자의 편에 서지 않는다면 결국 방관자가 될 뿐이라는 주장 역시 그렇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선명하지만, 동시에 읽는 나를 어느 정도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 책이 요구하는 단호함은 때로는 숨을 고르게 할 틈을 주지 않았다. 특히 다른 속도의 이해나 동의를 허용하지 않는 듯 단호한 어조나, ‘차별을 훔친다’는 표현은 또 다른 반발을 불러올 가능성도 있어 보였다.
그럼에도 이 책을 쉽게 밀어내기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충분히 직면하지 않았던 질문들을 다시 꺼내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개인의 노력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문제들조차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왔다. 몇 년 전 코미디언 크리스 록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배우 윌 스미스의 아내가 자가면역질환으로 인한 탈모와 삭발을 한 것을 두고 놀린 적이 있었다. 윌 스미스는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그의 뺨을 때렸다. 그 폭행사건에 대해 <뉴욕 타임즈>가 쓴 것처럼, “사회는 끊임없이 개인에게 무던해지고 참아내길 요구한다.”(p.266) 그 사건이 나에게 일어났다면 나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맞는 것인가.
계란으로 바위치기가 소용없는 짓이라고 해도 끊임없이 계란을 바위에 던지면서 내가 불편하다는 걸 호소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의 세상이 이전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졌다면, 그것은 자연스러운 변화라기보다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해온 목소리들의 결과일 것이다.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계속 말해온 사람들 덕분일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확신하지 못한다. 이 책의 모든 주장에 동의한다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나는 자식들을 키우는 입장에서 이 문제가 다음 세대로 어떻게 이어지는지도 체감한다. 저자가 가져온 넷플릭스 드라마 <소년의 시간>의 대사를 읽으며 나는 마음이 먹먹해졌다.
“내가 너무 관심을 안 줬나봐. 근데 자기 방에 있었잖아. 우린 안전하다고 생각했어. 애가 안전한 줄 알았지. 그 안에서 무슨 나쁜 짓을 하겠어? 우리가 잘하고 있는 줄 알았어.”(p.23)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아이들이 얌전히 학교 잘 다니고, 노트북 앞에서 공부를 하면, 어른들은 그들이 어떤 세상에서 살아가는지 알아낼 방법이 없다. 아이들의 세상 속에 여성혐오적인 극단주의가 판을 치더라도, 어른들은 ‘인셀’이란 용어도 처음 듣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는 과연 무엇을 알고 있나.
나는 부모로서도 이 젠더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느낀다. 엄마 세대보다 나아진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를 보고 자라는 딸들이 나보다 덜 망설이며 살아가길 바란다면, 나는 지금보다 조금은 덜 침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서도 젠더라는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는 행위가 어느 한쪽을 옹호하고 대변하는 입장만이 아니라 “소수자와 약자가 딛고 선 땅이 얼마나 척박한지 이해하는 행위에 조금 더 가깝다”는 저자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책 말미에 저자가 제시하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느슨한 연대’에 형광펜을 조심히 그었다. 비록 조금 불편하더라도 어느 한쪽을 밀어내고 배제하지 않는 세상. 온라인에서 모든 상황을 판단하지 않는 세상. 연대를 위해 모두가 광장으로 나오길 바라는 세상을 바라며.
“연대는 평소에 생각해보지 못했던 삶에 대해서 생각하는 일,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일이다. 그건 어쩌면 낯선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환대이자 사랑일지도 모른다.”(p.278)
희망을 버리고 싶지 않다. 다음 세대들을 위해서라도. 어쩌면 이 지점을 위해 그토록 모두가 투쟁을 해왔는지도 모른다. 서로의 차별을 훔치지 말고, 곁을 지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다.
브런치기사는 기사 원문보다
좀 더 설명과 예시가 들어가 있는 상태입니다.
요즘 여러 가지 개인사와 여행, 오마이 기사마감까지 겹쳐
브런치연재를 못했어요.
다음주에는 꼭 돌아올게요.
다들 봄날 잘 즐기고 계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