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리는MK Jun 29. 2024

다음 계단으로 가는 걸음은, 오직 스스로 떼어야 해요.

5/23일, 부서지고 혼자 있는 시간들 

 




샤론. 지금으로부터 딱 한 달 전, 저는 바닷가에 있었습니다. 인제에서 한 시간쯤 달리면 나오는 작은 항구에 갔어요. 항구 이름도 어쩜, '후진항'인지... 그래요. 저는 그 때 '후진' 마음이자 '후진하고 싶은' 상태였어요. 한 달이 지난 지금, 모래에 묻어놓고 온 그 '후진' 마음이 시간의 파도에 쓸려 그대로 수면 위로 올라와 나를 마주보고 있습니다. 

 

어떤 '후진' 마음이었냐고요? 


정말이지 꺼내기 싫은 이야기지만, 돈. 돈 얘기 입니다. 큰 돈을 벌어본 적도, 만져본 적도 없는 나에게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많은 걱정과 조언을 해옵니다. [앞가림을 못하고 있는 것 아니냐. 현실감각이 없다. 그 나이 먹도록 모아둔 돈이 없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부터 시작해서, [대체 너는 뭘 하는데 그렇게 바쁘게 돌아다니니? 뭘 하고 다니는 거야?] 라는 원초적 질문 까지. 그 때부터 저는 조개처럼 입을 꼭 다물게 됩니다. 왜냐하면, 할 말이 없거든요. 초라한 통장 잔고 앞에서 당당할 자신이 없거든요. 


바꾸어 생각해보면, 내가 하고싶은 대로 나아가고 있지만, 남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하고 그 가치를 돈으로 바꾸는 경험은 매우 적었다는 소리 입니다. 이것은 또 한 편으로 나를 참 부끄럽고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SNS에 올렸던 일기같은 글을 보고, 친구였던 한 사람은 이런 말을 남긴 채 인연을 끊기도 했습니다.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면서, 돈 걱정 안 하고 싶다고 하는 건 너무 철이 안 든거 아니야? 정신 차려.] 


자유롭기로 선택해놓고서 궁핍함 앞에서는 나약하고 초라해지는 마음. 진짜 후지죠? 노후를 걱정하는 부모님에게 용돈을 드리고 오기는 커녕, 부모님 상조 보험에 가입은 했냐는 소리에 알아보겠다고 대충 얼버무리고는 도망치듯이 인제로 내려온 나. 후진항에서 돌에다 눈동자를 그리면서 코를 훌쩍 거렸습니다. 






저번 주, 샤론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갔지요. 샤론의 홈페이지를 정리할 디지털 코칭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고, 가능하다면 매일 게시물을 올리는 챌린지도 해보자고, 삶을 바꾸는 승부를 내보자는 포부도 나눴습니다. 비가 퍼붓는 토요일. 샤론과 짧은 안녕을 한 뒤, 석 달 가까이 벽화를 그렸던 <초록공간> 오픈식도 마쳤습니다. 서울에 도착해 침대에 몸을 눕히자마자  '볼로냐 그림책 워크숍'이 오픈했다는 알람이 떴습니다. 워크숍에 적힌 금액도 봤습니다. 이탈리아에 작품을 출품할 수 있는 대신, 참가비용이 300만원이 드는 프로젝트였습니다. 


그 때부터 제 마음은 후진항에 들어가더니 침제기가 시작 되었습니다.


태아처럼 계속 잠만 자고 회피했어요. 무엇이 두렵고 부담스러웠냐고요? [남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하고 그 가치를 돈으로 받는 경험]에 정말 자신이 없었거든요. '남들의 필요'를 만족시키지 못했을 때 돌아오는 반응과 피드백에 좌절된 기억들. 저는 늘 납작 엎드려서 죄송하다고 빌거나, 필요 이상으로 비굴해지거나, 대가를 충분히 받지 못하는 경험들을 했었습니다. 그 경험이 괴로워서 창작을 하겠다고 도망쳐 나왔지만- 실은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창작들이 정말로 내가 원하고 있는 것인지는 매일 제 자신에게 질문해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게 최선이야? 정말 하고 싶었던 것 맞아? 하고싶은 것을 하겠노라고 결정했던 그 순간부터 궁핍함이 계속 됐는데...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정말로 원했던 것이 아니면 어떡해? 이게 내 최선의 끝이면 어떡하지? 이런 내가 정말 경제적 가치를 만들 수 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불안과 의심. 이런 나를 매일 매일 SNS에 올리며, [볼로냐 일러스트 워크숍에 보내주세요] 라고 어필하는 일이라니... 도망칠 구석도 없이 맨 알몸뚱이가 되어서 무대 위에 올라서는 느낌이었습니다. 


속이 답답해서 나도 무언가 말하고 싶은데, 겉으로 드러나는 표현은 느려서 정신 차리고 보면 어느 덧 타인의 이야기를 그저 듣고 있는 답답한 내가 되어 있습니다. 그 사이 저는 완전히 고갈되어 버렸어요. 108배도 멈춘지 어느 덧 일주일이 되었습니다. 오늘만큼은 절해야지, 108 대 참회문을 틀었다가 그냥 자리에서 자로 뻗은 채로 영상이 다 끝날 때까지 시체처럼 누워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영상으로 넘어가고, 법륜스님이 이런 말씀을 하는 게 아니겠어요? 


'여러분, 욕심이 꼭 놀부 심보만 말하는 거 같죠? 하나 갖고 있는데 하나 더 갖고 싶어서 탐 내는 거, 그런 알아채기 쉬운 욕심도 있지만, 착하고 싶고 잘 되고 싶고 그게 욕심이 아닌 게 아니야. 그것도 다 욕심이지. 마냥 좋기만 바라는 것도 욕심이예요. 다 내 마음 같고 내 뜻 같았으면 하는 것도 욕심이고, 누가 나를 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다, 하는 것도 욕심이고. '

 

탐욕스러운 마음은 모든 것을 내 자신과 내 궤도 안에서 통합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누구도 이기적인 세계를 가꾸어 나감으로서 더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사다리가 아무리 튼튼하게 지탱해주고 있다 할지라도 사다리를 제대로 쓰려면, 다음 계단으로 올라가야 한다. 각 계단에서 머무르지 않고 발걸음을 떼어 놓으려고 해야한다는 것이다.


-선 치료, David Brazier 


샤론님이 빌려주신 책을 읽고 알아버렸습니다. 


나의 어떤 부분도 부서지지 않고 그저 받아들여지기 바라는 것은 '이기적인' 마음이라는 것을. 내 궤도 안에서 하던 것만 하고 있으면 그 어떤 성장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것이 작품이던, 디지털 코칭이던, 그 무엇이 되었던- '결국 해봐야 하는구나.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다음 계단으로 발을 떼는 것은 오로지 나 만이, 내가 할 수밖에 없는 것이구나.' 



돈을 갖고 싶어하면서도 두려워하는 나. 그림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싶으면서 두려워 하는 나. 내가 한 최선이 별 볼일 없을까봐, 얼마나 평범한지 속속들이 다 까발려질까봐 너무도 두려웠던 나. 


그러나 사랑은 내가 특별하기를 요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기꺼이 부서져보라고 말합니다. 


샤론의 코칭 제안에 마음이 무거웠던 이유도 알았어요. 저는 그대를 실망 시키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과거의 기억처럼 무언가가 조금이라도 어그러질까봐 두려웠던 거예요. 제 안에 있었던 금전적인 것에 대한 두려움과 비굴함이 드러날까봐 무서웠던 거예요. 제 능력이 영특하지 않을까봐 무서웠던 거예요. 참 우습죠. 


하지만 이제 부서져야 할 때 입니다. 다음 단계로 발을 떼어야 하는 건 오로지 제 몫이예요. 








24/6/29/@MK


(+) 24/6/28일, 샤론의 편지와 답장이 도착했습니다.

https://blog.naver.com/lotus6948/223493655903

https://blog.naver.com/lotus6948/223493954127


작가의 이전글 무엇이 되는 게 아니라 그저 존재하려고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