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기획을 가능하게 했나
세상이 존재한 이래로, 누가 제일 처음 '기획'이란 작업을 시작했을까. 문득 이런 생각에 사로잡혔다. 우리는 흔히 기획을 인간만의 고유한 능력으로 여긴다고 생각했다. 복잡한 사업 계획을 수립하고, 도시의 청사진을 그리며, 개인의 인생 경로를 설계하는 행위가 모두 인간의 의식적인 사고에서 비롯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획의 본질을 더 깊이 들여다보니, 그 뿌리가 인류의 역사보다 훨씬 더 원초적이고 더 광활한 영역에 닿아있음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기획(Planning)이란 미래를 준비하는 행위다. 다가올 상황을 예측하고 이를 대비해 현재의 행동을 조정하는 과정으로, 단순한 본능적 반응이 아닌 문제 해결과 자원 배분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지능적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획의 원형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필자는 그 답을 자연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자연계를 관찰해 보면, 기획은 결코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다. 수많은 생명체가 각자의 지능 수준과 생존 환경에 맞춰 놀랍도록 정교한 기획을 수행하고 있다. 지능적 행위는 크게 고지능과 저지능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고지능 생명체는 인간처럼 먼 미래의 복잡한 일을 계획하지만, 저지능 생명체는 즉각적이고 단기적인 미래를 대비한다.
까마귀의 사례부터 살펴보자. 뉴칼레도니아 까마귀는 미래 필요를 예측해 음식을 숨기고, 다른 새가 훔치지 않도록 위장까지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이 나뭇가지를 구부려 갈고리 도구를 만들어 먹이를 꺼내는 행동을 보인다는 점이다. 이는 여러 단계의 과정을 거치는 복잡한 기획 능력의 증거로, 단순한 본능을 넘어선 인과관계 파악과 순차적 계획 수립의 결과물이다. 침팬지는 더욱 정교한 기획자다. 바나나를 꺼내기 위해 상자를 쌓거나, 개미를 잡기 위해 긴 막대기를 사용하는 것은 물론, 복잡한 사회 구조 안에서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동맹을 맺거나 경쟁자를 기만하는 등 장기적 관점의 정치적, 전략적 행동을 보인다.
저지능 생명체들도 나름의 기획을 수행한다. 바다거북이는 알을 낳은 후 위장 둥지를 만들어 포식자로부터 보호하며, 지구 자기장을 이용해 장거리 이동을 계획한다. 개미는 페로몬을 통해 최적 경로를 찾아 음식을 운반하며, 이는 중앙 통제 시스템 없이도 수만 마리의 개체가 협력하는 분산 지능 시스템의 결과다. 새들의 이주 패턴 역시 계절 변화를 예측해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하며, 기후 패턴을 활용해 식량과 번식지를 확보하는 정교한 계획의 산물이다.
출처: Lummi.ai ⓒ Umut Hasanoglu
그렇다면 이러한 기획 행동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그 시작은 아마도 '알지 못한 채 행했던' 무수한 시행착오였을 것이다. 최초의 생명체는 생존에 유리한 행동이 무엇인지 의식적으로 알지 못했다. 그저 생존에 성공한 행동은 유전자에 각인되거나 경험을 통해 학습되어 반복되었고, 실패한 행동은 도태되었다. 이 과정이 수억 년간 반복되면서 생명체들은 환경에 내재된 '패턴'을 본능적으로 체득하거나 지능적으로 학습하게 되었다.
패턴 인식 능력이야말로 단순한 반응을 넘어선 예측과 대비, 즉 기획의 핵심이다. 기획 행동이 반복되면 동물들은 환경 자극에 대한 패턴을 학습하거나 진화적으로 내재화한다. 이는 시행착오에서 시작해 성공적인 전략을 재사용하는 형태로 발전한다. 연구에 따르면 패턴 인식은 지능의 지표로 여겨지며, 고지능 종일수록 복잡한 패턴을 발견하고 적용할 수 있다.
고지능 종과 저지능 종의 기획 패턴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흥미로운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 유인원, 일부 새나 포유류 같은 고지능 종은 뇌의 복잡한 구조 덕분에 장기적 미래를 상상하고, 다중 변수를 고려한 계획을 세운다. 이들은 시퀀스와 순서를 예측하고, 사회적 협력을 통한 문화 전승을 수행하며, 적응적 혁신을 통해 새로운 문제를 해결한다. 침팬지가 도구를 순차적으로 사용해 목표를 달성하는 행동, 돌고래나 원숭이가 무리 내에서 사냥 기술을 전수하는 방식, 까마귀가 새로운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는 혁신적 행동 등이 이에 해당한다.
반면 곤충이나 단순 포유류 같은 저지능 종은 주로 즉각적 생존에 초점을 맞춘다. 이들의 기획은 단순하지만 종 전체의 생존에는 충분히 유효했다. 다람쥐가 겨울을 대비해 견과를 저장하는 반복적 자원 저장, 곤충이 포식자를 피하는 고정된 경로를 따르는 위험 회피 루틴, 개미가 페로몬 신호에 따라 움직이는 환경 자극-반응 루프 등이 그 예다.
특히 '사회 지능 가설'은 주목할 만하다. 인간을 포함한 영장류의 큰 뇌가 복잡다단한 사회적 관계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진화했다는 이론으로, 누가 친구이고 누가 적인지, 누구와 협력해야 이득을 얻는지 등 보이지 않는 사회적 패턴을 읽고 자신의 행동을 계획하는 고차원적 기획 능력이 생존에 결정적으로 유리했음을 시사한다.
총명한 학습자인 인류는 이러한 자연의 정교한 시스템에서 문제 해결의 영감을 얻는 법을 터득했다. 바이오미미크리(Biomimicry, 자연 모방 기술)가 바로 그 지혜의 산물이다. 인간 사회의 시스템 구조는 자연을 모방한 경우가 많다. 게코 도마뱀의 발 구조에서 착안한 접착제, 새의 날개 구조를 모방한 비행기 설계, 고래 지느러미를 응용한 효율적인 풍력 터빈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는 인간이 불편함이나 어려움을 마주할 때 자연의 해결책을 빌려온 결과다.
현재도 자연의 지혜를 활용한 혁신은 계속되고 있다. 개미 군집의 협력 시스템을 모방한 '개미 군집 최적화' 알고리즘은 도시 교통 관리나 물류 공급망 최적화에 활용되고 있다. 대형 물류 회사에서 트럭 경로를 계획할 때 이 알고리즘을 사용해 효율성을 높이고 있으며, 도시 계획에서도 개미의 분업과 협력을 본떠 교통 흐름을 개선하거나 지속 가능한 에너지 분배 시스템을 설계하고 있다.
철새의 이주 패턴 역시 기후 변화 대응에 중요한 교훈을 준다. 새들은 계절 변화에 따라 장거리 이동하며, 기후 패턴을 예측해 식량과 번식지를 찾는다. 기후 변화로 봄이 일찍 오면 이주 타이밍이 앞당겨지거나, 일부 종은 북쪽으로 정착한다. 이를 인간 사회에 적용하면 재난 대비 인구 이동 계획이나 농업 패턴 조정에 활용할 수 있다. 새들의 장거리 이주를 모방해 공급망을 유연하게 재설계하거나, 도시를 기후 적응형으로 재구성하는 것도 가능하다.
현대 기술의 정점이라 불리는 인공지능(AI)조차 그 근원은 인간 뇌의 신경망 구조와 작동 방식을 모방한 인공신경망에 있다. 인류가 유인원에서 지금의 형태를 갖춘 것도 진화를 통해 형성된 결과이며, AI 역시 35억 년 진화가 빚어낸 가장 정교한 기획 컴퓨터인 인간의 뇌를 모방함으로써 탄생했다. 이는 인류의 기획이 자연의 패턴을 관찰하고, 이해하며, 응용하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진화해 왔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자연의 진화 시스템은 무작위해 보이지만, 수천만 년 동안 구성된 패턴이 존재하며, 지금도 진화를 통해 패턴화 되고 있다. 코끼리는 장기 기억을 통해 물 구멍 위치를 패턴화해 가뭄을 대비하고, 돌고래는 사회적 협력을 통해 사냥 패턴을 학습한다. 꿀벌은 춤을 통해 자원 위치 정보를 동료에게 전승하며, 이는 사회적 협력과 문화적 전승의 기초가 된다.
따라서 과거 인간이 직면한 문제들을 자연으로부터 해결책을 찾아왔듯이, 앞으로의 문제들도 자연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도시 과밀화나 자원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미의 분업 시스템을 응용하거나, 기후 변화 적응을 위해 철새의 이주 지혜를 활용하는 것처럼, 바이오미미크리 전략은 지속 가능한 미래를 설계하는 핵심 도구가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기획이라는 행위는 인류의 탄생과 함께 시작된 것이 아니라 생명 현상 그 자체에 내재된 본질적 속성이다. 그것은 '알지 못한 채 행했던' 최초 생명체의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에서 시작되었다. 하루하루의 생존을 위한 절박한 행동들이 반복되고 축적되면서 패턴을 형성했고, 지능이 싹트고 발달하면서 이는 점차 체계적이고 정교한 미래 전략으로 진화했다.
포식자를 피하기 위한 동물의 본능적 움직임에서 시작된 기획은, 도구를 사용하고 사회를 이루는 고등 지능을 거쳐, 마침내 문명을 건설하고 우주를 탐사하며 미래 그 자체를 설계하는 인간의 위대한 능력으로 꽃 피웠다. 저지능에서 시작된 단순한 기획이 고지능으로 진화하면서 체계화되고 정리되어 오늘날 '미래 전략'이라는 개념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기획은 단순히 생존의 수단에 그치지 않는다. 생존에서 출발했지만, 공동체를 형성하고, 문화를 이어가고, 미래를 설계하는 인간의 본질적 능력이 되었다. 그것은 어제와 오늘을 살아남게 한 생명의 지혜이며, 불확실한 내일을 가능하게 하는 희망의 열쇠다. 자연 모방을 통해 미래 문제를 해결하면, 인류는 더 지속 가능한 세상을 기획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기획이란, 생존을 위한 최후이자 최고의 수단으로써, 하루하루 생명을 이어가기 위한 절실함에서 출발하여 미래 전체를 창조하는 강력한 전략으로 발전한 인류의 가장 근본적인 능력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