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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적인 친절

어떤 도움은 왜 폭력으로 느껴지는가

by 닥터브룩스

이런 경험을 누구나 한 번쯤 하게 된다. 자신을 ‘배려’한다며 약속 일정을 일방적으로 잡아 통보하는 일이다. 문제는 자신이 도저히 참석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는 점이다. 정중히 거절하자 일방적으로 통보한 사람이 진심으로 서운해하는 눈치였다. 마치 세심하게 준비한 선물을 자신이 걷어차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의 선한 의도를 의심하지는 않지만, 그날 그 자신은 하루 종일 묘한 불편함에 시달려야 했다. 감사해야 할 배려 앞에서 오히려 미안함과 분노가 뒤섞인 감정을 느꼈던 까닭은 무엇일까. 왜 어떤 친절은 고맙기보다 부담스럽고, 어떤 도움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보다 옭아매는 족쇄가 되는 것일까?




우리는 살면서 타인의 선의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순간을 종종 마주한다. 자녀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너의 미래를 위해’ 온갖 학원 스케줄을 꽉 채우는 부모, 연인의 취향은 고려하지 않은 채 ‘널 위해 준비했다’며 값비싼 선물을 안기는 사람, 사회의 맥락은 무시한 채 ‘우리가 도와주겠다’며 섣부른 지원을 강행하는 조직까지. 이 모든 행동의 공통점은 ‘선의’라는 가면 뒤에 자신의 욕망을 숨기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현상을 ‘선의의 폭정’이라 부르고 싶다. 이는 악의에서 비롯된 폭력이 아니라, 상대를 위한다는 명분 아래 상대의 자율성을 침해하고 자신의 가치관을 강요하는, 아주 미묘하고 교묘한 형태의 지배라고 생각한다. 선의의 폭정은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는 은밀한 확신에서 출발한다. 그 기저에는 자신의 경험과 판단이 상대보다 우월하다는 믿음, 즉 메타인지의 부재가 깔려 있다. 글을 통해서 자주 거론하는 심리학의 더닝-크루거 효과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을 설명하는데, 이는 지적 능력뿐만 아니라 타인의 감정과 상황을 이해하는 공감 능력에도 적용된다. 선의의 폭군들은 타인의 복잡한 내면세계를 이해할 능력이 부족하기에, 자신의 단순한 기준으로 타인의 필요를 재단한다. 그들은 ‘나라면 이게 필요할 테니, 저 사람도 분명 이걸 원할 거야’라는 위험한 착각에 빠져 있다. 이는 타인을 자신과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는 대상으로 여기는 것과 같다.


Pexels.com ⓒ 2020 Vie Studio


철학자 칸트가 말했듯, 타인을 그 자체로 목적으로 대하지 않고 자신의 도덕적 만족감이나 인정 욕구를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행위인 셈이다. 이러한 패턴은 개인의 관계를 넘어 인류의 역사 속에서도 거대한 형태로 발견된다. 19세기 서구 열강이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자행했던 식민 지배의 핵심 논리는 ‘미개한 원주민을 문명화시킨다’는 사명이엇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 언어, 제도를 이식하는 것이 원주민을 위한 ‘시혜’라고 굳게 믿었다. 선교사들은 영혼을 구원한다는 선한 의도로 아프리카의 토착 신앙과 공동체를 파괴했고, 제국주의자들은 발전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그들의 자원을 수탈하고 삶의 방식을 뒤흔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르는 폭력의 실체를 보지 못했다. ‘우리는 선하고 그들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대한 자기기만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역시 개인의 필요와 자율성을 완전히 무시한 채 자신들의 기준을 강요한,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선의의 폭정’이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선의의 폭군들이 자신의 행동이 거부당했을 때 보이는 반응이다. 그들은 자신의 접근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고 성찰하는 대신, 자신의 선의를 몰라주는 상대를 ‘배은망덕한 사람’으로 규정하고 비난한다. 자녀가 학원에 가기 싫다고 저항하면 ‘부모 마음도 몰라주는 이기적인 자식’이라며 상처를 주고, 원주민들이 식민 지배에 저항하면 ‘우리의 은혜를 모르는 미개한 폭도’로 취급한다. 이는 실패의 원인을 외부로 돌려 자신의 완벽한 자아상을 지키려는 방어기제이다. 그들은 결코 실패의 책임을 지지 않는다. 애초에 그들의 목표는 상대방의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 ‘나는 이렇게 선하고 유능한 사람이다’라는 자기만족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이 남긴 것은 파괴된 관계와 깊은 상처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미묘하고도 강력한 폭정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타인을 돕고자 하는 마음 자체는 숭고하다. 하지만 진정한 도움은 자신의 기준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세상으로 겸손하게 걸어 들어가는 데서 시작된다. 그것은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는 대신 상대의 침묵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고,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함께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진정한 친절은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줄까?’를 묻기 전에, ‘너는 지금 무엇이 필요하니?’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용기다. 우리가 베푸는 선의는 과연 상대방의 세계를 비추는 창문인가, 아니면 그저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인가? 오늘 우리가 무심코 건넨 따뜻한 배려가, 실은 상대방을 옥죄는 또 다른 폭정은 아니었는지 조용히 돌아볼 일이다. 진정한 공감은 상대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을 넘어, 상대가 자신의 입장을 스스로 말할 수 있도록 묵묵히 기다려주는 지혜에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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