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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적인 쉬움

쉬운 것은 직관적인가.

by 닥터브룩스

일상에서 '직관적'이라는 표현을 참 많이 마주한다. 새로 출시된 스마트폰, 업데이트된 애플리케이션, 심지어 새로 들인 주방 가전까지, 한결같이 '더욱 직관적인 사용자 경험'을 약속한다. 그리고 이 말을 별다른 설명 없이도 즉각 이해할 수 있는 상태, 혹은 '사용하기 쉬운'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토록 편하게 사용하는 '직관적'이라는 말과 '사용하기 쉽다'는 말은 과연 같은 의미일까? 직관적이면 반드시 사용하기 쉬운가? 더 나아가, 그 반대는 어떠한가? 사용하기 쉽다면 그것은 모두 직관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만약 이 관계가 한쪽으로만 흐른다면, 우리가 '직관'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방식 어딘가에 근본적인 오해가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이 흔한 단어 속에 담긴 복잡성을 파헤쳐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먼저, 사용하기 쉬운 것이 항상 직관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부터 짚어보자. 자전거 타기를 생각해보면 명확하다. 이 세상 누구도 자전거를 보자마자 그 균형의 원리를 '직관적으로' 깨닫고 페달을 밟아 나아가지 못한다. 넘어지고, 무릎이 깨지고, 핸들을 엉뚱하게 꺾는 수많은 실패와 고통스러운 연습의 과정이 필요하다. 즉, 자전거 타기는 전혀 직관적이지 않다. 하지만 일단 이 과정을 거쳐 몸이 기억하게 되면, 자전거 타기는 더할 나위 없이 '사용하기 쉬운' 행위가 된다. 우리는 페달을 밟는 행위나 균형을 잡는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을 의식하지 않고도 공원의 풍경을 즐기며 나아간다. 이는 그 행위가 직관적이어서가 아니라, 수많은 연습을 통해 완벽하게 '숙달'되고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직관'과 '숙달된 용이성' 사이의 첫 번째 균열을 발견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이해하기 쉬운 것'과 '사용하기 쉬운 것' 사이에도 깊은 골이 존재함을 알게 된다. 우리는 종종 이 둘을 혼동한다. 예를 들어 훌륭한 강사에게 스포츠 이론 강의를 듣는다고 상상해보자. 골프 스윙의 원리, 공기역학, 클럽 페이스의 각도 같은 복잡한 개념도 명쾌한 설명을 통해 아주 '이해하기 쉽게' 배울 수 있다. 우리는 머리로, 즉 뇌로 그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선언적 지식('무엇'을 아는 것)이 필드 위에서 완벽한 스윙을 '사용'하는 절차적 지식('어떻게' 하는지 아는 것)으로 곧장 이어지지 않는다. '사용'이라는 말은 본질적으로 몸을 쓰는 '행동'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행하는 것 사이의 이 거대한 간극은, '이해'가 '사용'을 보장하지 않음을, 그리고 '사용하기 쉬움'이 또 다른 차원의 문제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다이어트의 원리(적게 먹고 많이 움직인다)를 완벽히 '이해'하는 것과 그것을 '사용'하여 체중을 감량하는 것이 전혀 다른 문제인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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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xels.com ⓒ 2021 Kampus Production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가 느끼는 '직관성'의 정체는 무엇인가? 우리가 어떤 앱의 버튼을 보고 "아, 이건 당연히 닫기 버튼이네"라고 느끼는 순간, 우리 뇌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그 답은 '기억'에 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직관적'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사실 우리의 뇌가 과거의 방대한 장기 기억 속에서 유사한 패턴을 초고속으로 검색해 일치하는 항목을 찾아냈다는 신호다. "내가 이전에 사용했던 수백 개의 프로그램에서 'X' 표시는 모두 닫기 버튼이었어." 이 패턴 매칭 과정이 너무나 빠르고 자동적으로 일어나기에, 우리는 거의 아무런 정신적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대니얼 카너먼이 '시스템 1'이라고 명명한, 이 빠르고 자동적이며 무의식적인 사고 시스템이 작동한 것이다. 인지적 부하가 거의 '0'에 가까웠기에, 우리는 그 경험을 '직관적'이라고 결론 내린다.


반대로 우리가 생전 처음 보는 방식의 인터페이스를 마주하면, 뇌의 기억 저장고에는 일치하는 패턴이 없다. 시스템 1은 실패하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시스템 2'를 가동해야 한다. 시스템 2는 느리고, 의식적이며, 분석적인 사고 시스템이다. 우리는 잠시 동작을 멈추고, 사용 설명서를 읽거나 이 버튼이 어떤 기능을 할지 의식적으로 추론해야 한다. 이 과정은 정신적으로 고단하고 에너지를 소모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경험을 '직관적이지 않다' 혹은 '복잡하고 어렵다'고 판단한다. 결국, '직관'이란 대상 자체에 깃든 절대적인 속성이 아니다. 그것은 대상과 사용자 사이의 '관계' 속에서, 특히 사용자의 '축적된 기억'을 기반으로 발생하는 지극히 상대적인 판단이다. 2025년을 사는 우리에게 '스와이프' 제스처는 지극히 직관적이지만, 1995년의 사용자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손짓에 불과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두 가지 흥미로운 사례를 통해 더욱 명확해진다.

첫 번째는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디지털 인터페이스의 진화다. 초창기 컴퓨터가 '데스크톱', '폴더', '휴지통' 같은 은유를 사용한 것은 천재적인 발상이었다. 이는 사용자의 '기억 1', 즉 현실 세계(사무실 책상)의 기억을 그대로 디지털 환경으로 전이시켜, 전혀 새로운 기계의 사용법을 '직관적'으로 느끼게 만들었다. 이후 등장한 스마트폰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터치스크린을 통해 물리적 버튼을 누르는(기억 1) 행위와 기존 컴퓨터 사용(기억 2, 디지털 기억)을 결합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화면 하단에서 위로 쓸어 올리는 제스처(기억 2의 확장)를 통해 홈 화면으로 돌아간다. 이는 현실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행동이지만, 지난 10여 년간 축적된 '디지털 네이티브 기억' 덕분에 우리 세대에게는 완벽하게 직관적인 행동이 되었다. 이처럼 '직관의 기준'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의 보편적 기억이 축적됨에 따라 계속해서 진화한다.


두 번째 사례는 '직관'과 '본능'의 구분이다. 우리는 종종 이 둘을 혼동하기도 하지만, 둘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거미는 누구에게 배우지 않아도 태어나자마자 완벽하게 복잡한 거미줄을 친다. 이는 '직관'이 아니라 '본능'이다. 생존을 위해 유전자에 각인된, 학습되지 않은 하드웨어적 프로그램이다. 뜨거운 것에 손이 닿았을 때 반사적으로 손을 떼는 우리의 행동 또한 본능이다. 반면 '직관'은 철저히 '학습된' 것이다. 그것은 우리 뇌라는 하드웨어 위에서, 경험이라는 데이터를 먹고 자란 소프트웨어(시스템 1)다. 거미의 본능은 수백만 년간 변하지 않았지만, 인간의 '직관적 인터페이스'는 불과 5년마다 급격하게 변한다. 이는 직관이 유전적 프로그램이 아닌, 역동적인 학습과 기억의 산물임을 증명한다.


이 모든 논의를 종합하면, 우리는 '직관'을 '깨달음'으로 오해해왔다는 결론에 이른다. 어떤 문제에 대해 깊이 사색하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 "아하!"하고 무릎을 치는 순간은 '깨달음' 또는 '통찰'이다. 이는 시스템 2가 격렬하게 활동한 결과물이다. 하지만 '직관'은 그 정반대에 있다. 그것은 깨달음을 향한 고통스러운 노력이 아니라, 과거의 수많은 학습과 노력이 이미 끝나고 완전히 '자동화'된 상태다. 자전거 타기를 처음 배울 때의 시스템 2의 고통이, 수백 번의 연습을 거쳐 시스템 1의 자동화된 기술로 전환된 것과 같다. '직관적'이라는 것은 깨달음의 순간이 아니라,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기에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는 '자동화'의 상태를 의미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힘들지 않음(effortless)'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만약 '직관'이 원인(디자인이 내 기억과 일치함)이라면, '힘들지 않음'은 그 결과(정신적 저항 없이 부드럽게 작동함)다. 직관적인 디자인은 곧 힘들지 않은 경험을 선사한다. 내 기억과 꼭 맞는 열쇠가 자물쇠에 부드럽게 돌아가는 느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직관적'이라고 부르는 경험의 본질이다.


우리는 '직관적'이라는 흔한 단어에서 출발해, 인간의 기억과 학습, 그리고 두뇌의 작동 방식(시스템 1과 2)에 이르는 복잡한 여정을 거쳤다. 직관은 신비로운 영감이나 천부적 재능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경험이 쌓여 만들어진 '자동화된 기억'의 다른 이름이었다. 우리가 매끄럽고 편안하게 사용하는 기기들은 마법을 부린 것이 아니다. 단지 그것을 만든 이들이 우리의 기억을(현실 세계의 기억이든, 디지털 세계의 기억이든) 더 깊이 이해하고 존중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 직관적인가?"가 아닐지도 모른다. 대신 "이것은 누구의 기억을 반영하고 있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내일의 '직관'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오늘 어떤 새로운 기억을 의식적으로 쌓아가야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할 때인 것 같다. 아니면 이미 늦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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