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터러시와 권력의 상관관계
“제가 끊임없이 주장하는 게, ‘리터러시를 문제 삼는 사람들의 러터러시를 문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리터러시다’라고 정의하는 것, 사회학적으로 보면 그게 바로 권력이거든요. 이것이 리터러시다 하면 저것은 리터러시가 아닌 것이 돼버려요. 그렇게 리터러시를 정의한 다음에, 그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문해력이 있는 사람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무 능력이 없는 무능력자로 낙인찍는 것, 그것이야말로 권력이죠”
-유튜브는 책을 삼킬 것인가? 삶을 위한 말귀, 문해력, 리터러시, 김성우x엄기호 지음
일상에서 종종 타인에게 순응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판사가 법정에 들어설 때 일어서고, 교수가 교단에 서면 강의실이 조용해지며, 명장이 작품을 살필 때는 숨죽여 그 평결을 기다린다. 이러한 존중과 주목을 이끌어내는 이 보이지 않는 힘은 무엇인가? 이는 단순한 물리적 강압이나 법적 명령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바로 ‘권위’라는 감각적 무게이다. 우리는 그들이 특정 영역에서 우리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암묵적인 진실을 인정하기에 본능적으로 자세를 낮춘다. 이 일상적인 경험은 서양 철학사에서 가장 오래도록 회자되는 한 문장,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을 생생하게 떠올리게 한다.
16세기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 남긴 라틴어 원문 "scientia potentia est"라는 이 선언은 직관적으로 옳게 들린다. ‘정보가 생명’이라고까지 말하는 시대에 베이컨의 통찰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울림을 준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미세한 균열이 보게 될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처럼 온갖 사실과 정보를 꿰고 있는, 이른바 ‘지식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보며 판사나 명장에게서 느끼는 것과 같은 힘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들은 분명 지식을 ‘소유’하고 있지만, 권위는 부족해 보인다. 전문지식이 아니어서 그런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그렇다 하더라도 만약 아는 것이 곧 힘이라면, 왜 모든 앎이 자동적으로 힘을 부여하지 않는 것인가?
아마도 베이컨이 말한 힘은 지식의 ‘소유’가 아니라 그것의 ‘적용’과 ‘영향력’에서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힘의 역학 관계는 한 사람이 아는 것과 다른 사람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 사이의 격차, 즉 ‘지식의 비대칭성’에서 만들어진다. 힘은 뇌 속에 저장된 데이터가 아니라, 그 데이터가 특정 맥락 속에서 제공하는 영향력 그 자체이다. 입력된 글이 권위의 뿌리를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 추적한 것은 이 지점을 정확히 짚어낸다. 고대에 힘은 종종 ‘원로’들에게 주어졌다. 그들의 권위는 단순히 나이가 많다는 사실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나이가 상징하는 방대한 경험의 총량에서 비롯되었다. 경험에서 비롯된 지식은 그들이 가뭄과 홍수, 갈등과 해결의 과정을 겪어낸 일들이었다. 그들의 지식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를 겪어낸 시간으로 써 내려간 생존 지침서였다.
이 개념을 입력된 글이 제시한 사냥꾼의 비유처럼 조금 더 원초적인 예시를 들어본다. 식량을 구하기 위해 두 무리가 사냥을 떠났다고 상상해 보자. 한 무리는 가장 힘세고 빠른 사람이 이끌고, 다른 무리는 비록 신체적으로는 약할지라도 과거에 그 동물을 추적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 이끈다. 후자의 리더는 동물의 습성, 물 마시는 곳, 바람에 따른 행동 변화를 ‘알고’ 있다. 첫 번째 무리가 우연에 기댈 때, 두 번째 무리는 ‘지식’에 기댄다. 이 순간, 경험 많은 사냥꾼의 경험에 관한 한 권위는 절대적이다. 그의 앎이 곧 무리의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상징적인 힘이 아니라, 생명을 유지하는 실질적인 리더십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원칙은 인간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전문성의 중력’을 자연계 전반에서 관찰할 수 있다. 코끼리 무리의 지도자는 가장 덩치가 큰 수컷이 아니라, 가장 나이가 많은 암컷(이를 가모장(matriarch)이라고 한다)이다. 그의 힘은 ‘기억력’에서 나온다. 그는 광활한 영토에 흩어져 있는 물웅덩이의 위치, 조상들로부터 배운 이동 경로를 모두 기억하는 무리의 살아있는 데이터베이스이다. 극심한 가뭄이 닥쳤을 때, 다른 무리가 죽어갈 때 그의 ‘지식’, 즉 축적된 경험은 무리를 물가로 인도한다. 그의 권위는 순수하게 그가 아는 것, 그리고 그것이 공동체에 제공하는 결정적 유용성에서 파생된다. 그의 앎은 가장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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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사회는 이러한 관계를 제도화했다. 우리는 그저 ‘똑똑한 사람’을 두는 대신, 이러한 권위를 공식화하는 전문적 역할, 즉 교수, 판사, 의사와 같은 전문적인 직함을 만들었다. 이 직함들은 그 개인이 특정 분야의 공인된 지식을 축적하고 정제했음을 나타내는 표식이다. 우리가 그들 앞에서 느끼는 권위는, 입력된 글의 지적처럼, 우리가 이 사실을 ‘인정’한다는 신호이다. 우리가 판사에게 복종하는 것은 그가 우리보다 법의 복잡성을 더 잘 안다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며, 명장을 신뢰하는 것은 그가 재료에 대한 깊고 촉각적인 이해를 가졌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사의 말을 믿는 것은 의학적인 지식에 있어서는 최고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인정’이야말로 힘의 교환 화폐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권력 구조에서 그 의미가 조금은 퇴색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현대적 관점이다. 아는 것이 힘이라면 왜 그 의미가 퇴색하는 것인가? 그것은 지식의 ‘본질’이 변했기 때문이다. 과거에 지식은 희소했고, 경험을 통해 어렵게 획득되었다. 반면 오늘날 정보는 압도적일 정도로 풍부하다. 단순히 사실을 많이 ‘아는’ 지식인(가령 퀴즈 챔피언)이 힘을 갖기 어려운 이유는, 이제 사실(fact) 자체가 저렴해졌기 때문이다. 누구나 검색을 통해 사실에 접근할 수 있다. 누구나 전문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이는 우리에게 새로운 핵심적인 구분을 요구한다. 바로 ‘정보(데이터)’, ‘지식(맥락화된 정보)’, 그리고 ‘지혜(적용된 지식)’ 사이의 차이이다. 고대의 사냥꾼과 코끼리 무리의 우두머리는 단순히 정보를 가진 것이 아니라 지혜를 가졌다. 그들은 자신이 아는 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원하는 결과를 얻는지 알았다. 현대 사회에서 힘의 축은 이동했다. 이제 힘은 단순히 지식을 ‘보유’한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효과적으로 ‘선별’하고 ‘해석’하며 ‘적용’할 수 있는 사람에게 속한다.
현대 기술의 영역을 생각해 보라. 21세기의 힘은 단순히 물웅덩이가 어디 있는지 아는 것이 아니라, 지도를 ‘통제’하는 것이다. 우리의 행동을 분석하고 예측하는 알고리즘, 즉 방대한 데이터를 소유한 기업들은 베이컨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새로운 종류의 힘을 휘두른다. 이 지식은 수동적이지 않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사고, 무엇을 읽으며, 심지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우리의 현실을 능동적으로 만든다. 이는 "scientia potentia est"가 사회적 규모로 증폭된 형태이다. 여기서 힘은 데이터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에서 파생된 인간 행동에 대한 정교한 ‘지식’과, 그 지식을 결과에 영향을 미치도록 ‘적용’하는 데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베이컨의 격언을 조금 다듬어야 한다. 앎은 그 자체로 힘이 아니다. 앎은 ‘잠재적인’ 힘이다. 그것은 연료일 뿐, 점화를 위해서는 적용, 맥락, 그리고 인정이 필요하다. 교수의 권위는 단지 박사 학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을 전달하여 이해를 창출하는 해석능력에서 나온다. 판사의 법 적용이 불공정하거나 무지하다고 인식되는 순간, 그의 권위는 사라진다. 이처럼 힘은 조건적이다.
이 사색은 다시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우리는 정보 습득에 집착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 ‘힘’을 축적하기 위해 기사를 읽고, 영상을 보며, 데이터를 수집한다. 하지만 고대의 사냥꾼, 코끼리 우두머리, 심지어 현대의 알고리즘이 주는 교훈은, 수동적인 축적은 무가치하다는 것이다. 힘은 앎을 행동으로 변환하는 과정에 있다. 정보를 권위로 바꾸는 것은 바로 ‘실행’을 통해 얻어진 ‘경험’이다.
따라서 ‘안다’는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진정한 질문은 “무엇을 아는가?”가 아니라 “알고 있는 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이다. 매일 수집하는 정보를 실용적인 지식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고유한 경험, 즉 각자의 ‘사냥’ 경험을 적용하고 가치를 창출하며, 문제를 해결하고, 타인을 이끌 수 있게 만드는 힘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은 목적에 의해 활성화(쓰임새의 구체화)되고 공동체에 의해 인정(이끌 수 있는 원동력)받을 때 비로소 힘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