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티어 역설이 말하는 기획

정당화된 참된 믿음 (JTB)

by 닥터브룩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진정으로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기획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잠시 철학적인 화두를 하나 던져보고자 한다. 1963년, 철학자 에드먼드 게티어(Edmund Gettier)는 3페이지짜리 짧은 논문 하나로 수천 년간 이어져 온 지식의 정의를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 전통적으로 지식은 '정당화된 참인 믿음(Justified True Belief)'으로 정의되어 왔다. 즉, 내가 무언가를 믿고 있고, 그 믿음이 사실이며, 그 믿음에 타당한 근거가 있다면 그것은 지식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게티어는 이 정의에 치명적인 반례를 제시한다. 가령, 당신이 광장의 시계탑을 보았고 시계바늘이 정확히 12시를 가리키고 있어 '지금은 12시다'라고 믿었다고 가정해 보자. 실제로 그때의 시간은 12시가 맞았다. 당신의 믿음은 참이었고, 시계탑이라는 근거도 있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 시계탑은 사실 어제 고장이 나서 멈춰있던 것이었고, 당신이 우연히 딱 12시에 그것을 보았을 뿐이라면 어떨까? 결과적으로 맞았지만, 이것을 과연 당신이 시간을 '알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게티어는 이것은 지식이 아니라 단지 '운'일 뿐이라고 일갈한다.


Gemini_Generated_Image_rpsnd5rpsnd5rpsn.png 게티어의 역설


이 '게티어의 역설'이 기획자에게 시사하는 바는 실로 섬뜩하다. 수많은 데이터와 그럴듯한 근거를 바탕으로 기획안을 작성하고, 그것이 성공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때로는 운 좋게 그 결과가 맞아떨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인과관계의 본질적인 흐름, 즉 시계가 왜 12시를 가리키고 있는지에 대한 기계적 연속성을 이해하지 못한 채 우연히 맞아떨어진 성공은 결코 '지식'에 기반한 기획이라 할 수 없다. 그것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사상누각이다. 매일 아침 책상 앞에서 다이어리를 펴고 할 일을 나열하는 행위가 진정한 기획이 되기 위해서는, 이 게티어의 늪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우연히 멈춘 시계를 보고 시간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시계의 태엽이 어떻게 맞물려 돌아가는지를 이해하는 것. 기획의 본질은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단순히 할 일의 목록을 적는 것을 넘어, '지식'이라는 단어를 기획의 관점에서 철저하게 재정의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매일 아침 책상 앞에 앉아 다이어리를 펼치거나 모니터 한구석에 메모장을 띄워놓고 오늘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을 적어 내려가는 행위는 현대인에게 일종의 의식과도 같다. 우리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계획한다. 여행을 가기 위해 동선을 짜고, 업무 프로젝트를 완수하기 위해 타임라인을 그리며, 심지어 주말 저녁 식사 메뉴를 결정하기 위해서도 냉장고 속 재료와 가족들의 식성을 고려한다. 그런데 문득 이런 의문이 든다. 단순히 할 일의 목록을 나열하고 시간을 배분하는 것을 진정한 의미의 '기획'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흔히 우리는 계획과 기획을 혼용해서 쓰곤 하지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그 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깊은 강이 흐르고 있다. 단순히 정해진 일정을 소화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판을 짜는 행위, 즉 기획의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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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지식'이라는 단어의 재정의에서부터 시작해보고자 한다.


기획의 관점에서 지식이란 단편적인 데이터의 정적인 집합이 아니다. 그것은 '연속된 정보를 활용할 수 있는 동적인 능력'이다. 게티어의 사례에서 멈춘 시계가 단절된 정보(데이터)라면, 흐르는 시간을 읽어내는 것은 연속성(지식)이다. 예를 들어보자. 창밖을 보며 '비가 온다'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은 단순한 정보 습득이다. 이것은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 그러나 진정한 지식은 이 점들을 연결하여 선을 만드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비가 온다는 정보가 입력되었을 때, '비가 오면 땅이 젖고, 도로가 미끄러워질 것이며, 평소보다 교통 체증이 심해질 것이다'라는 인과관계의 흐름을 읽어내는 능력이 바로 지식이다. 이 연속성을 파악하는 힘이 없다면 우리는 눈앞에 벌어진 현상에만 급급하게 대응할 뿐, 다가올 미래를 예측하거나 대비하는 기획을 할 수 없다. 즉, 기획의 밑바탕이 되는 지식이란 낱개의 정보를 엮어 맥락을 만들어내는 인지적 연결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지식의 속성을 가장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비유로 '그물망'을 들고 싶다. 정보가 지식이 되기 위해서는 흩어져 있는 실타래를 엮어 튼튼한 그물망으로 만드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바닷가에 널려 있는 수많은 실들이 그 자체로는 물고기를 잡을 수 없듯이, 우리 주변에 부유하는 수많은 정보들도 서로 연결되지 않으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여행을 기획하는 상황을 떠올려보자. 이동 수단, 숙박 시설, 관광지, 맛집 등은 각각 독립된 정보의 조각들이다. 이 조각들을 여행의 목적과 동반자의 취향, 그리고 가용 시간이라는 맥락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결할 때 비로소 '여행 계획'이라는 그물망이 완성된다. 이동 시간이 너무 길면 피로도가 높아져 관광을 즐길 수 없고, 숙소의 위치가 엉뚱하면 저녁 식사 후 이동에 곤란을 겪는다는 연결성을 이해하는 것이 바로 여행 기획의 핵심인 셈이다. 이처럼 정보와 정보 사이의 보이지 않는 끈을 찾아내어 촘촘하게 엮어내는 것이야말로 기획자가 갖춰야 할 첫 번째 덕목이다.


하지만 튼튼한 그물을 짰다고 해서 곧바로 만선(滿船)을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획의 두 번째이자 가장 결정적인 단계인 '전략'의 문제와 마주하게 된다. 그물망이 지식이라면, 그 그물을 '어디에 던질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기획이다. 노련한 어부는 아무 바다에나 그물을 던지지 않는다. 그는 물의 흐름을 읽고, 물고기의 습성을 파악하며, 계절과 날씨의 변화를 고려하여 물고기가 지나갈 길목을 예측한다. 이것은 앞서 말한 '연속된 정보를 활용하는 능력'이 고도화된 형태다. 기획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가진 지식의 그물망을 무작위로 펼치는 것이 아니라,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최적의 지점을 찾아내어 그곳에 자원을 집중하는 것이 기획의 정수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완벽한 그물을 짰다 하더라도, 물고기가 없는 곳에 던진다면 그것은 헛수고에 불과하다. 따라서 '어떤 것을 기획한다'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단순히 정보를 정리하는 것을 넘어 내가 가진 지식을 투영하여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는 길목을 선점하는 전략적 사고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논리를 구체적인 비즈니스 현장에 대입해 보자. '새로운 기기를 기획하라'는 미션이 주어졌다고 가정해 보자. 많은 사람들이 범하는 오류는 다짜고짜 '어떻게 만들까' 혹은 '어떤 기능을 넣을까'라는 방법론적 고민부터 시작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게티어의 문제의식과 기획의 본질에 따르면, 우리는 가장 먼저 대상 그 자체, 즉 '새로운 기기'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것은 어부가 바다의 상태를 살피는 것과 같다.


"이 기기가 과연 세상에 필요한가?"
"왜 필요한가?"
"기존의 기기로 대체할 수는 없는가?"


와 같은 질문들을 통해 기기의 존재 이유, 즉 '존재의 정당성'을 검증해야 한다. 만약 기존의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으로 충분히 대체 가능한 기능이라면, 굳이 새로운 하드웨어를 기획할 이유는 사라진다. 이 단계에서 필요한 것이 바로 해당 분야에 대한 깊은 도메인 지식이다. 시장의 포화 상태, 소비자의 피로도, 기술의 발전 속도 등 연속된 정보를 바탕으로 이 기기가 파고들 수 있는 틈새가 있는지, 그 틈새가 우리가 그물을 던질만한 가치가 있는 곳인지를 판단해야 한다.


이 검증 단계를 통과했다면, 그다음은 본격적인 '기획(Planning)'의 단계로 넘어간다. 여기서 기획이란 앞서 확인한 필요성과 이유, 그리고 대체 불가능성을 충족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지식 기반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사람들이 이동 중에도 고품질의 작문 보조를 원하지만,
노트북은 너무 무겁고 스마트폰은 입력이 불편하다"

는 정보들을 연결하여 논리적인 그물망을 짠다. 그리고 이 그물을 바탕으로 사용자의 불편함이 극대화되는 지점, 즉 우리의 솔루션이 가장 빛을 발할 수 있는 최적의 타깃과 시나리오를 향해 전략을 수립한다. 이것은 막연한 아이디어 나열이 아니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치밀한 시뮬레이션이다. 마지막으로 '미션(Mission)' 단계가 뒤따른다. 미션은 수립된 전략을 실행에 옮기는 구체적인 행위다. 기획이 '머리'라면 미션은 '손발'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획과 미션을 혼동하지만, 미션은 철저하게 기획된 전략 위에서 수행되어야만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전략 없는 실행은 맹목적인 노동일뿐이며, 실행 없는 전략은 공허한 망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결국 기획이라는 행위를 하나의 프로세스로 구조화한다면, 그것은 '대상에 대한 이해(Target)'에서 시작하여 '지식 기반의 전략 수립(Planning)'을 거쳐 '실행(Mission)'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흐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각 단계가 단절되지 않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대상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는 올바른 지식의 그물망을 짤 수 없고, 튼튼한 그물망 없이는 전략적인 지점을 포착할 수 없으며, 전략적 확신 없이는 과감한 실행이 불가능하다. 일상에서 혹은 업무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실패는 대부분 이 연결고리 중 어느 하나가 끊어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상을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그물을 던졌거나, 엉성하게 엮인 지식으로 엉뚱한 곳을 공략했거나, 혹은 완벽한 계획을 세워두고도 실행을 주저했을 수 있다.


또한, 기획은 일종의 투영이다. 나에게 축적된 지식과 경험이라는 빛을 통해 미래라는 불확실한 스크린 위에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미리 비춰보는 것이다. 그렇기에 기획자의 지식은 멈춰있는 고인 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흐르고 연결되는 강물이어야 한다. 단순히 '우연히 맞은 12시'에 안주하지 말고, 태엽의 움직임을 꿰뚫어 보는 통찰을 가져야 한다. 현상과 현상 사이의 인과를 보고, 그 흐름 속에서 기회라는 물고기가 지나갈 길목을 읽어내는 힘이야말로 기획의 알파이자 오메가다. 지금 당신이 무언가를 기획하고 있다면 잠시 펜을 멈추고 자문해보길 바란다. 나는 지금 운에 기대고 있는가, 아니면 인과를 꿰뚫고 있는가. 나는 흩어진 정보의 조각들을 쥐고 있는가, 아니면 그 조각들을 엮어 단단한 지식의 그물을 짜고 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그 그물을 던져야 할 정확한 지점을 알고 있는가. 이 질문에 명확하게 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무언가를 기획한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의 모든 순간이 기획의 연속인 우리에게, 이 촘촘한 사유의 그물망이 원하는 목적을 건져 올리는 강력한 도구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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