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싸움에 밀려난 물방울들

넘치는 순간, 밖으로 튀는 물의 정체

by 닥터브룩스

물이 가득 찬 통에 물을 더 붓는다. 수면은 찰랑거리고, 이내 넘치거나 튀어 오른다. 이때 밖으로 튀어 나가는 물은 새로 부은 물일까, 아니면 원래 통에 담겨 있던 물일까.




왜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


이 단순해 보이는 물리학적 질문은 의외로 기획의 본질을 관통한다. 유체 역학적으로 볼 때, 수면에 물방울이 떨어져 왕관 모양(Crown splash)을 그리며 튀어 오르는 그 찰나의 순간, 왕관의 벽을 이루는 것은 대부분 바닥에 고여 있던 기존의 물이다. 새로 부은 물은 그저 운동 에너지를 전달하는 피스톤 역할을 했을 뿐이고, 그 충격에 밀려나 비명을 지르며 튀어 오르는 것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오래된 물이다.


Gemini_Generated_Image_ujr9utujr9utujr9.png 가득 찬 물컵, 튀어 오르는 물의 비밀


기획자로서 책상 앞에 앉아 있다 보면, 우리는 종종 '가득 찬 물컵'을 마주한다. 사용자들에게 이미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있고, 비즈니스적으로도 안정 궤도에 오른, 소위 '잘 나가는 서비스' 말이다. 평온한 수면은 만족스러운 지표를 의미한다. 하지만 시장은, 그리고 회사의 성장 욕구는 그 평온함을 그대로 두지 않는다. 더 높은 매출, 새로운 타겟층, 시대에 뒤처지지 않기 위한 혁신이라는 명분으로 우리는 그 가득 찬 물통에 새로운 물을 부어야만 한다.


여기서 딜레마가 시작된다. 이미 사용자들에게 검증된 훌륭한 기능을 뜯어고쳐야 할 때, 멈칫하게 된다. 놔두자니 서서히 말라가는 도태된 우물이 될 것 같고, 개선하자니 평온한 수면을 깨뜨려 사용자의 불만을 살까 두렵다. 이것은 경영학에서 말하는 '혁신가의 딜레마(Innovator’s Dilemma)'이자, 모든 창작자가 겪는 '두 번째 시스템 효과(Second System Effect)'의 공포다.


많은 기획자가 이 상황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기존 구조로는 안 됩니다. 싹 다 갈아엎어야 합니다." 소위 '빅뱅(Big Bang)' 방식이다. 물통을 비우고 새 물을 채우겠다는 선언이다. 기술적 부채를 청산하고, 최신 트렌드를 반영한 UI로 무장하면 사용자들이 환호할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텅 빈 물통에 쏟아부어지는 물은 완충제가 없어 바닥에 부딪히며 더 격렬하게 사방으로 튄다. 사용자는 익숙함을 잃어버린 공허함 속에서 길을 잃는다. 변화의 J커브(J-Curve)가 보여주듯, 전면 개편 직후의 생산성과 만족도는 예외 없이 곤두박질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변화를 만들어야 하는가. 다시 물통의 비유로 돌아가 보자. 물을 붓되, 넘치거나 튀게 하지 않고 물의 성질을 바꾸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치환'이나 '전복'이 아닌 '희석(Dilution)'과 '혼합(Mixing)'의 과정이어야 한다.

화학 공학에는 '연속 교반 탱크 반응기(CSTR)'라는 모델이 있다. 반응기에 새로운 물질을 투입할 때, 투입 즉시 내부의 물질과 완벽하게 섞인다고 가정하는 이상적인 모델이다. 이 모델에 따르면, 새로운 물을 붓기 시작한 초기 단계에서 밖으로 넘쳐흐르는 물의 99%는 기존에 있던 물이다. 새로운 물은 아주 천천히, 기존의 물과 섞이며 전체의 농도를 변화시킨다.


이 원리는 기획에 아주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사용자는 '기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습관'을 사용한다. 그들에게 익숙한 UI, 버튼의 위치, 화면의 흐름은 일종의 근육 기억(Muscle Memory)이다. 이것은 사용자가 서비스를 이용하며 쌓아온 신뢰의 총량이자, 앞서 말한 '기존의 물'이다. 우리가 새로운 기능을 도입할 때 발생하는 사용자의 반발(튀어 오르는 물)은, 신규 기능이 나빠서가 아니다. 나의 무의식적인 습관이 침해받았을 때 나오는 본능적인 저항이다.

따라서 현명한 기획자는 물통을 비우지 않는다. 대신 아주 조심스럽게 새로운 물을 섞는다. 이를 위한 가장 세련된 전략은 레이먼드 로위가 주창한 'MAYA(Most Advanced, Yet Acceptable)' 원칙과 맞닿아 있다. "가장 진보적이되, 여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전략을 성공적으로 구사하는 기업들은 '그릇'을 바꾸지 않고 '내용물'을 바꾼다. 구글의 검색 페이지를 떠올려보자.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얀 바탕에 검색창 하나가 덩그러니 있는 모습은 같다. 하지만 그 이면의 검색 알고리즘과 결과 페이지가 보여주는 정보의 밀도는 천지개벽 수준으로 변했다. 사용자는 자신이 매일 같은 물을 마신다고 착각하지만, 구글은 그 물에 지속해서 비타민과 미네랄을 타서 먹여왔다. 사용자가 눈치채지 못할 속도로, 아주 조금씩 농도를 바꾼 것이다.


인스타그램의 변화 과정 또한 훌륭한 혼합의 사례다. 그들이 틱톡(TikTok)에 대항하기 위해 '릴스(Reels)'라는 숏폼 비디오 기능을 도입해야 했을 때, 그들은 기존의 피드를 없애버리지 않았다. 대신 사용자의 시선이 닿는 곳에 작은 진입점을 만들고, 릴스라는 새로운 물을 별도의 탭으로 분리하여 조심스럽게 부었다. 사용자가 기존의 사진 중심 피드를 즐기는 경험(기존의 물)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원할 때 새로운 경험(새로운 물)을 맛볼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사용자들이 숏폼에 익숙해지자, 서서히 피드 안에도 릴스를 섞기 시작했다. 지금은 사진과 영상이 뒤섞여 있지만, 누구도 그것을 어색해하지 않는다. 충분한 시간 동안 희석되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기획자가 가져야 할 태도는 '통제권의 이양'이다. 새로운 기능을 강제로 주입하는 것은, 입을 벌리게 하고 억지로 약을 털어 넣는 것과 같다. 아무리 몸에 좋은 약이라도 뱉어내고 싶어진다. 대신 "새로운 경험을 해보시겠습니까?"라는 작은 문 하나를 열어두는 것이 낫다. 이른바 '옵트인(Opt-in) 베타' 전략이다. 호기심 많은 사용자(얼리어답터)들이 먼저 그 문을 열고 들어와 새로운 물을 맛보게 한다. 그들은 변화에 관대하고, 기꺼이 튀어 오르는 물방울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의 피드백을 통해 물의 온도를 조절하고, 점차 그 문을 넓혀 나가는 것. 이것이 물을 튀기지 않고 수위를 높이는 방법이다.


우리는 종종 혁신을 '파괴'와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한다. 낡은 것을 부수어야 새로운 것이 선다는 믿음이다. 하지만 소프트웨어, 특히 충성도 높은 사용자를 보유한 서비스에서의 혁신은 파괴가 아닌 '진화'여야 한다. 테세우스의 배처럼, 판자를 하나씩 갈아 끼워 항해를 멈추지 않으면서도 어느새 완전히 새로운 배가 되어 있어야 한다.


지금 당신의 기획안이 "사용자에게 새로운 가치를 주기 위해 기존의 UX를 대폭 변경한다"라고 적혀 있다면, 잠시 멈추어 물통을 바라보라. 당신이 붓고 싶은 것은 가치인가, 아니면 당신의 성취감인가. 사용자가 느끼는 것은 혁신의 감동인가, 아니면 익숙함을 뺏긴 상실감인가.

물이 튀어 오른다면, 그것은 당신이 너무 급하게 부었기 때문이다. 사용자의 불만은 그들이 우매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그만큼 당신의 서비스를 아끼고 익숙해져 있었다는 증거다. 그 튀어 오르는 물방울이 바로 당신이 지난 시간 공들여 채워놓은 신뢰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니 부디, 천천히 부어야 한다. 기존의 물이 새로운 물을 껴안을 시간을 주어야 한다. 훌륭한 기획은 사용자가 변화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환경에 이미 자신이 '적응해 있음을' 뒤늦게 깨닫게 하는 것이다. 가장 좋은 변화는, 물이 언제 바뀌었는지도 모르게 목 넘김이 좋아진 그런 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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