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로운 도적은 의인인가? 악인인가?

역설과 도덕의 충돌

by 닥터브룩스

최근 고전 문학을 다시 읽다가 우연히 마주친 '의로운 도적(의적)'이라는 표현 앞에서 나는 한참 동안 시선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홍길동이나 로빈 후드 같은 이야기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기에 얼핏 자연스러워 보이는 말이지만, 곰곰이 뜯어보면 이는 매우 이질적인 단어들의 충돌이 아닐 수 없다. '도적'이란 타인의 재산을 강탈하고 사회 질서를 파괴하는 존재이므로 본질적으로 '의롭지 못한' 대상이다. 그런데 그 앞에 정의와 선함을 뜻하는 '의로운'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다.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가치가 어떻게 하나의 존재 안에 공존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관통하는 묵직한 물음이지 않을 수 없다. 왜 이런 모순적인 존재에 열광하며, 믿고 있는 선과 악의 절대적 정의는 과연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기 쉬운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순형용'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나 '달콤한 슬픔'처럼 서로 배타적인 단어를 결합해 제3의 초월적 의미를 만들어내는 수사법이다. 의로운 도적은 바로 이 모순형용의 정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표현은 단순히 도둑질이라는 행위가 선해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법과 시스템이 붕괴되어 범죄를 저질러야만 비로소 정의가 실현될 수 있는 비극적인 사회 현실을 역설적으로 고발하는 것이다.(임꺽정이나 로빈후드처럼) 법이 민중을 보호하지 못할 때, 정의의 정의(Definition)가 법전이 아닌 거리로 이동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법의 눈으로 볼 때 그는 여전히 범죄자이지만, 고통받는 민중의 눈으로 볼 때 그는 구원자가 된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세상이 흑과 백으로 명확히 나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의 논리'와 '도덕의 논리'가 충돌하는 복잡한 층위로 이루어져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image.png 악인과 의인의 동시성


이런 모순적인 속성은 비단 문학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와 현대 사회 곳곳에 다른 이름으로 숨 쉬고 있다. 국제 뉴스에서 흔히 접하는 '테러리스트'와 '독립투사'라는 용어를 떠올려보자. 이 두 단어는 종종 정확히 같은 집단이 행하는 정확히 같은 무력 행위를 묘사한다. 차이는 오직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에 달려 있다. 질서를 수호하려는 지배 정부의 입장에서 그들은 평화를 파괴하는 잔혹한 테러리스트다. 하지만 억압받으며 독립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들은 목숨을 걸고 해방을 위해 싸우는 영웅적인 투사다. 여기에는 절대적인 객관적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누구의 이익을 대변하느냐에 따른 해석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러한 서늘한 상대성은 우리가 믿는 역사가 어쩌면 '승자의 기록'일 뿐이라는 사실을 뼈아프게 자각하게 만든다.


시선을 조금 더 일상적인 영역으로 돌려보면, 경제와 기술의 발전 과정에서도 비슷한 딜레마를 마주한다. 경제학자 슘페터가 주창한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 역시 대표적인 모순적 개념이다. 우리는 혁신을 찬양한다. 인공지능(AI)과 자동화 기술이 등장하여 효율성을 높이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에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이 '창조'에는 필연적으로 '파괴'가 수반된다. 새로운 AI 서비스를 기획하는 개발자에게 이 변화는 '창조'이자 진보이지만, 그 소프트웨어에 의해 일자리를 잃는 노동자에게 이 변화는 철저한 '파괴'이자 재앙이다. 마치 자동차의 발명이 마부들에게는 생존의 위협이었던 것처럼, 누군가의 유토피아는 누군가의 디스토피아가 될 수 있다. 만약 '창조'의 측면만 본다면 현실의 고통을 외면한 비정한 낙관론자가 될 것이고, 반대로 '파괴'에만 매몰된다면 미래를 거부하는 러다이트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현상의 본질을 꿰뚫기 위해 이 상반된 두 얼굴을 동시에 인지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가장 개인적인 인간관계 안에서도 회색지대를 경험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하얀 거짓말(White Lie)'이 그렇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거짓말은 나쁜 것이라고 배운다. 정직은 미덕이다. 하지만 중요한 면접을 앞둔 친구가 "나 오늘 옷차림 좀 이상해?"라고 물었을 때, 완벽하지 않더라도 "아니, 아주 멋져. 자신감을 가져."라고 말해주는 것은 나쁜 것일까? 이 상황에서 엄격한 정직(진실)은 오히려 '해로운' 것이 되고, 거짓(기만)은 친구의 불안을 잠재우는 '의로운' 행위가 될 수 있다. 그 거짓말의 동기가 속임수가 아닌 배려와 사랑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관계에서 진실이 언제나 최상위 가치는 아니며, 때로는 관계의 보전과 상대방의 존엄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음을, 즉 윤리란 고정된 계율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하는 역학임을 알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경계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러한 회색지대를 인정하는 것에는 치명적인 위험도 도사리고 있다. 바로 '필요악'이라는 함정이다. "더 큰 선을 위해 작은 악은 불가피하다"는 이 논리는 역사 속 수많은 독재자와 권위주의적 리더들이 가장 사랑했던 변명이다. 그들은 경제 성장이나 국가 안보라는 미명 아래 '자애로운 독재자'를 자처하며 인권을 탄압했다. 그들은 자신의 억압이 다수의 안정을 위한 '필요한 전략'이라고 강변한다. 그러나 그 '필요'는 누가 정의하는가? 그리고 희생되어야 할 소수는 누가 결정하는가? 즉,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의 정당성은 누가 결정하는 것인가? 이 논리를 비판 없이 수용한다면, '대의'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모든 폭력을 정당화해야 될지도 모른다. 의적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법을 어기지만, 자애로운 독재자는 시스템을 살리기 위해 사람을 희생시킬 수도 있다. 이 둘의 경계는 종이 한 장 차이이며, 날카로운 비판적 사고가 없다면 악당을 영웅으로 착각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모순투성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나는 우리에게 단순함이라는 안락한 도피처를 포기할 것을 제안한다. 누군가를 '나쁜 도둑' 혹은 '착한 영웅'으로 딱지 붙이는 것은 쉽다. 어떤 정책이 '무조건

좋다'거나 '무조건 나쁘다'고 단정 짓는 것은 편하다. 하지만 진실은 언제나 불편하고 복잡한 곳에 있다.

F. 스콧 피츠제럴드는 "일류 지성의 척도는 두 가지 상반된 아이디어를 머릿속에 동시에 품으면서도, 여전히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다"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일류 지성의 증표이기 때문이다. 의로운 도적을 보며 절도라는 범죄를 비판함과 동시에, 그를 필요로 했던 사회의 부조리에 분노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기술의 혁신을 보며 그 편리함을 환영함과 동시에, 그로 인해 밀려나는 이들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도 함께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결국 세상은 정답이 정해진 시험지가 아니다. 효율과 윤리, 질서와 자유, 현실과 이상이 끊임없이 밀고 당기는 거대한 연속체다. 이 모호함을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편견의 덫에서 빠져나와 세상을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 당신이 마주한 어떤 현상이 단순히 '의롭다' 혹은 '해롭다'고 판단하기를 멈추고, "이것은 누구에게 의로우며, 누구에게 해로운가?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묻기 시작하는 순간, 당신의 진짜 기획과 사유는 시작된다. 당부컨대, 오늘 당신의 눈앞에 펼쳐진 모순을 외면하지 말고, 그 회색의 안개 속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 안개 속에 있는 진실에 가장 가까운 무언가가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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