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과 자연선택
꽉 막힌 도로 위를 서다 가다를 반복하는 자동차들의 행렬을 무심히 바라보곤 한다. 아스팔트 위를 구르는 수만 개의 타이어들은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해 회전하고 있다. 문득 그 검은 고무바퀴를 보며 기묘한 생각에 잠긴다. 자동차가 달리면 달릴수록, 타이어의 표면은 도로와의 마찰을 이기지 못하고 아주 미세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깎여 나간다.
물리학의 세계에서 마찰은 곧 소모를 의미한다. 두 물체가 맞닿아 비비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는 열로 흩어지고, 물질의 결합은 끊어지며, 결국 원래의 형태를 잃어가는 것, 이것이 우리가 아는 상식적인 마찰의 결과다. 이것은 엔트로피의 법칙, 즉 모든 질서 있는 것은 무질서한 상태로 나아간다는 열역학 제2법칙에 충실한 현상이다. 타이어는 그 법칙에 순응하며 자신의 수명을 깎아 도로 위에 헌납한다.
그런데 시선을 나의 발, 정확히는 구두 속의 발뒤꿈치로 옮기면 상황은 기이하게 역전된다. 인간은 매일 걷는다. 때로는 뛰기도 하고, 불편한 신발을 신고 장시간 서 있기도 한다. 타이어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발뒤꿈치 역시 지면, 혹은 신발 안창과의 끊임없는 마찰에 시달린다. 물리학의 법칙이 공평하게 적용된다면, 인간의 살점 또한 타이어처럼 마모되어 얇아지고 결국에는 닳아 없어져야 마땅하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다. 닳기는커녕, 마찰이 반복된 자리는 굳은살이 박이며 더욱 단단해진다. 외부의 자극이 강해질수록 피부는 각질층을 겹겹이 쌓아 올려 방어벽을 구축한다. 무생물인 타이어는 쓰면 쓸수록 소멸해 가는데, 생물인 인간의 신체는 쓰면 쓸수록 강인해진다. 이 지점에서 일종의 전율과 함께 질문을 던지게 된다. 도대체 무엇이 이토록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어내는가. 생명 현상은 과연 물리학의 법칙을 거스르는 초자연적인 기적인가, 아니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더 깊은 차원의 물리적 적응인가.
이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우주의 절대적인 규칙, 즉 열역학의 세계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타이어와 같은 무생물은 '닫힌 계(Closed System)'에 가깝게 작동한다. 외부로부터 에너지를 스스로 받아들여 구조를 재건할 능력이 없다. 따라서 마찰이라는 외부 스트레스가 가해지면, 그 에너지는 고무 분자의 결합을 끊어내는 데 사용되고, 떨어진 입자는 도로 위에 흩어지며 영원히 사라진다. 복구 불가능한 손실이다. 하지만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는 '열린계(Open System)'다. 인간은 끊임없이 외부에서 에너지를 섭취한다. 음식을 먹고, 숨을 쉬며 대사 활동을 통해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굳은살이 생긴다는 것은 단순히 피부가 딱딱해지는 현상이 아니라, 인간의 몸이 섭취한 에너지를 사용하여 엔트로피의 증가, 즉 신체의 붕괴를 적극적으로 막아내는 고도의 방어 기제가 작동한 결과다.
마찰이 발생하면 피부 세포는 이를 '파괴의 신호'가 아닌 '적응의 신호'로 해석한다. 물리적 스트레스가 감지되는 순간, 기저층의 세포들은 분열 속도를 높이고 케라틴이라는 단단한 단백질을 과잉 생산하여 표면으로 올려 보낸다. 이것은 물리학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물리학의 파괴적인 힘에 대항하기 위해 또 다른 물리학적 에너지(대사 에너지)를 투입하여 균형을 맞추거나, 오히려 그 균형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울이는 능동적인 행위다. 즉, 생명은 엔트로피라는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가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를 젓는 배와 같다. 노 젓기를 멈추는 순간, 즉 죽음이 찾아오는 순간 인간 역시 타이어처럼 부패하고 닳아 없어질 운명이다. 따라서 굳은살은 살아있음을, 그리고 에너지를 소비하여 질서를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그렇다면 왜, 아니 생명체는 이런 복잡하고 에너지가 많이 드는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을까. 여기서 '자연선택'이라는 진화의 필터를 통과해야 한다. 태초의 환경을 상상해 보자. 거친 들판을 맨발로 뛰어다녀야 했던 인간의 조상들 중, 발바닥이 타이어처럼 쉽게 마모되는 유전자를 가진 개체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얼마 못 가 발에 상처를 입고, 감염되어, 사냥을 하거나 포식자를 피하는 데 실패했을 것이다. 반면, 물리적 자극을 받으면 피부를 두껍게 만드는 돌연변이 유전자를 가진 개체들은 살아남았다. 그들의 '굳은살'은 단순한 피부 조직이 아니라, 거친 환경이라는 물리적 장벽을 극복하게 해주는 최첨단 갑옷이었다.
자연선택은 냉혹한 심판관이다. 자연은 그 어떤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다. 단지 주어진 환경 조건에서 살아남기에 '적합한(Fitted)' 개체만을 다음 라운드로 진출시킬 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수함'의 정의다. 흔히 생각하는 우수함이 절대적인 강함이나 지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굳은살이 박이는 형질이 우수한 이유는 그것이 지구의 중력과 마찰력, 그리고 거친 지면이라는 특정 환경 조건에서 생존 확률을 높였기 때문이다. 만약 지구가 푹신한 솜사탕으로 이루어진 행성이었다면, 굳은살은 오히려 감각을 둔하게 만들어 생존에 불리한 요소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마찰에 저항하여 더 단단해지는 성질은 수십억 년에 걸친 진화의 역사 속에서 물리학의 법칙과 타협하고, 때로는 그것을 이용하며 살아남은 '최적화'의 산물이다.
이러한 관점은 더 깊은 생물학적 통찰, 즉 '이기적 유전자'의 리처드 도킨스가 주창한 '유전자 중심의 시각'으로 이끈다. 타이어와 발뒤꿈치의 비교에서 시작된 사유는 이제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된다. 물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몸은 언젠가 흙으로 돌아갈 일시적인 원자의 집합체다. 굳은살로 아무리 무장한다 한들, 노화와 죽음이라는 궁극적인 엔트로피를 피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인간의 몸속에 있는 유전자는 다르다. 유전자는 복제라는 수단을 통해 시간을 초월한다. 인간의 발뒤꿈치에 굳은살을 만들라고 지시하는 그 정보, 그 설계도는 인간의 몸이 사라진 후에도 자손의 몸을 통해 영속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인간의 몸은 유전자가 잠시 머무는 '생존 기계(Survival Machine)'에 불과하다는 표현은 섬뜩하리만치 정확하다. 유전자는 스스로 생각하거나 계획하지 않는다. 다만 과거의 환경에서 성공적이었던 생존 전략들을 데이터베이스처럼 축적하고 있을 뿐이다. 굳은살은 그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된 수만 가지 생존 매뉴얼 중 하나다. "마찰이 발생하면 단백질을 합성하라"는 이 간단한 명령줄 하나가 수백만 년 동안 수많은 개체의 목숨을 구했다. 우리는 그 성공한 데이터들의 집합체다.
'적응'이라고 부르는 것은 결국 유전자가 축적해 온 '압축된 경험'이다. 인간이 굳은살을 만들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인간의 조상들이 이미 그 고통과 극복의 과정을 처절하게 경험했고 그 결과를 인간의 유전자에 새겨 놓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 거대한 도서관의 열람자이자, 동시에 그 도서관을 다음 세대로 전달해야 하는 운반자다. 그러므로 진화는 단순히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실패한 수많은 시도들을 폐기하고, 성공한 시도들만을 남겨놓은 철저한 '데이터 최적화' 과정이다. 물리학이 문제를 출제하는 선생님이라면, 자연선택은 채점관이고, 유전자는 그 시험을 통과한 모범 답안지들의 묶음인 셈이다.
마찰은 물건을 닳게 한다. 하지만 생명은 그 마찰을 성장의 재료로 삼는다. 이것이 타이어와 발뒤꿈치를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다. 그리고 이 차이야말로 삶을 대하는 태도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일상도 수많은 마찰로 가득 차 있다. 예상치 못한 문제, 인간관계의 갈등, 실패의 경험 등은 타이어처럼 닳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생존 기계다. 우리 안에는 수억 년을 이어온 '적응적 경험'이 내재되어 있다. 스트레스와 고난을 단순히 피해야 할 마모의 과정으로만 인식한다면 무생물적인 반응, 즉 소진과 붕괴를 겪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굳은살을 만들기 위한 신호, 즉 더 단단해지고 강해지기 위한 입력값으로 받아들인다면 생물학적 본성에 충실한 성장을 이뤄낼 수 있다.
기획자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나는 스스로에게 다시 묻는다. 나는 오늘 어떤 마찰을 겪었는가. 그리고 그 마찰 앞에서 나는 타이어처럼 닳아 없어지고 있는가, 아니면 발뒤꿈치처럼 굳은살을 만들고 있는가. 물리학의 법칙이 지배하는 이 우주에서, 엔트로피에 저항하며 질서를 만들어내는 유일한 방법은 외부의 충격을 에너지로 전환하여 내부를 단단하게 다지는 것뿐일 것이다.
결국 살아남는다는 것은 단순히 숨이 붙어 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환경이 주는 시련을 데이터로 삼아 끊임없이 자신을 업데이트하는 과정이다. 우수한 조건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상황에 가장 잘 반응할 수 있는 '유연함'과 '회복탄력성'을 의미한다. 물리학과 자연선택, 그리고 유전자의 긴밀한 협주곡 속에서 깨닫는다. 인간을 죽이지 못하는 마찰은 인간을 더 강하게 만들 뿐이라는 니체의 잠언은 단순한 철학적 수사가 아니라, 지극히 과학적인 생명의 원리였다는 것을.
지금 당신의 발바닥을 만져보라. 그 딱딱한 굳은살은 당신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 당신이 이겨낸 마찰, 그리고 당신 안에 내재된 수억 년 된 승리의 기록이다. 인간은 그렇게 설계되었다. 닳아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굳어지고 단단해지며 끝까지 나아가도록. 이것이 생존 기계인 우리가 가진 가장 위대한, 그리고 유일한 목적이지 않을까.